매일신문

올해 잔잔한 감동 남긴 검사들

범죄자를 상대로 진실을 파헤쳐야 하는 검사들은 늘 긴장과 스트레스 속에서 산다.

매일 그런 상황에 놓이다 보니까 때때로 죄를 지은 사람들을 처벌만 하면 임무는 끝이라는 상식의 틀에 자신을 맞추기도 한다.

그러나 상식을 거부하면서, 안타까운 범죄 피해자들을 발벗고 나서 도와주거나 자포자기한 범죄자에게 삶의 희망을 찾아준 검사들도 적지 않다.

대검찰청은 올해 잔잔한 감동을 남긴 검사들의 사건 수사 사례를 모아 25일 발표했다.

◇ 중국동포 어머니 잃은 딸 도와 줘 = 김모(14) 양은 지난해 1월 돈을 벌어오겠다며 한국으로 갔던 어머니를 잃었다.

중국동포인 어머니 박모 씨는 김양을 친정에 맡기고 한국으로 들어와 일하다 사귀던 남자에게 살해당했다.

졸지에 고아가 된 김양은 생활비가 끊기자 중국에서 다니던 중학교를 그만둬야 했지만, 사연을 전해들은 서울동부지검 형사 5부 명재권 검사의 도움으로 학비를 지원받을 수 있게 됐다.

명 검사는 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 지원을 의뢰했고, 김양의 사연을 들은 센터측은 생활비와 중·고등학교 학비 등 1천88만원을 지원해줬다.

◇ '장발장' 막은 젊은 검사 = 부모가 이혼해 아버지와 생활하던 전 모(27)씨는 아버지의 잦은 음주와 폭행을 견디다 못해 혼자 살며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전씨는 올 5월 초 건축공사장에서 허리를 다쳐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며칠을 굶어야 했다.

그는 새벽에 슈퍼마켓 유리창을 깨고 안으로 들어가 먹을 것을 훔치려다 주인에게 잡혔다. 죄명은 특수절도미수.

서울남부지검 형사 2부 소병진 검사는 전씨가 자란 환경이나 범행 경위를 따져보다 구속 기소해 처벌하는 것보다 직업을 찾아주고 정상적으로 사회 생활을 하도록 도와주는 게 재범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소 검사는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일자리를 남부지검 범죄예방협의회에 알선해주도록 요청했다.

전씨의 사연을 들은 협회측은 전씨를 택시회사 직원으로 채용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 부모 잃은 청소년들 학업·생계 지원 = 서울북부지검 형사5부 김재구 검사는 올 10월 말다툼 중 남편이 아내의 목을 졸라 살해한 사건을 수사하게 됐다.

김 검사는 피의자를 살인 혐의로 구속했지만,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마저 구속된 자녀를 그냥 보아 넘길 수 없었다.

그는 서울북부피해자지원센터에 자녀에 대한 지원을 의뢰했고, 센터 사무국장과 상담위원들이 이들의 집을 방문해 쌀과 라면, 김치 등 생필품과 긴급 생계비를 전달했다.

센터측은 이후 매월 50만 원씩 6개월 간 생계비 300만 원을 추가 지원하기로 했다.

수능 시험을 앞두고 있던 피의자의 딸에게는 계속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방과후 공부방을 알선해줬고, 정신적인 충격을 이길 수 있도록 사회복지사, 상담위원들과 다리를 놔줬다

◇ 20여년만에 아버지 만나게 해줘 = 창원지검 형사 3부 안희준 검사는 야간주거침입절도 혐의로 구속된 피의자(23)를 조사하면서, 피의자가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고 보육원에서 자랐으며 아버지를 한번이라도 만나기를 희망한다는 딱한 사연을 들었다.

안 검사는 호적조회, 주민등록조회를 통해 병원에 입원 중인 피의자의 아버지를 찾아내 검사실에서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도록 주선했다.

50년 동안 죽은 언니의 이름으로 살아온 이모(50·여)씨의 경우도 있다.

이씨는 810만 원을 가로챈 혐의로 구속됐다가 호적에 이름조차 올라 있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

광주지검 형사 1부 박재현 검사는 이씨의 진술을 꼼꼼하게 챙겨 이씨의 팔순 노모가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법률구조공단의 도움으로 이씨가 이름과 호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 캐러멜로 고소 사건 합의= 광주지검 형사 1부에는 난감한 고소 사건이 접수됐다.

인접한 밭을 경작하며 수십 년 간 형제처럼 지낸 노인 두 명이 사소한 오해로 사이가 멀어지더니 한쪽이 밭의 경계에 있던 나무를 베어버리자 다른 쪽이 재물 손괴 혐의로 고소하게 된 것.

검찰은 두 노인이 수십 년 간 가깝게 지내온 만큼 화해시키려고 했지만 서로 상대방을 헐뜯는 바람에 화해는커녕 조사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두 노인에게는 검사실을 찾는 숨겨진 즐거움이 있었다.

바로 호박엿 맛이 나는 캐러멜. 두 노인은 조사받을 때 한 움큼씩 먹을 정도로 캐러멜을 좋아했다.

검사실 직원 한유선씨는 캐러멜을 숨겨 뒀다가 조사가 잠시 중단되는 등의 이유로 두 사람 중 한 명만 남았을 때 캐러멜을 주면서 '다른 노인이 오면 함께 드시라'고 말을 건넸다.

냉담한 관계였던 두 노인은 캐러멜을 나눠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대화의 계기를 찾게 됐고, 사건은 없던 일이 됐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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