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교단에서] 겨울 산사

가을을 지나 겨울이 찾아오는 저물녁 산사(山寺)는, 깊이 침묵하고 있다. 겨울 산사 시린 하늘 위 철새 떼들이 처량한 울음소리를 부리에 물고 떠나가고 있다. 세상의 모든 소리들이, 문득 침묵한다. 노랗게 빨갛게 단풍 물들었던 나뭇잎들이 떨어져 내린 뒷산 숲속은 텅 비워져 가고 있다. 세상의 모든 색(色)들이 사라진다. 겨울 산사 반짝이는 샘물 위를 저녁 으스름이 어둡게 내려앉고 있다. 세상의 모든 형상(形象)들이 어둠 속에 잠긴다. 겨울 숲속은 모든 것이 지워지고 사라지고 텅 비워져있다. 그 텅 빔 속에서 겨울은 새로운 소리와 색깔과 형상을 채워 내년 봄을 완성할 것이다. 텅 빈 겨울 산사의 어둠 속 걸어가야 할 길이 어둡기만 하다.

수능시험 성적표가 발표되었다. 성적표를 받아든 아이들의 표정은 붉게 푸르게, 밝게 어둡게 엇갈리고 있다. 시험 결과에 한껏 고무된 채 담임선생님들과 진학상담을 하는 축들이 있는가 하면, 구름 한 점 낮게 떠도는 시린 하늘이 바라보이는 교실 창가에 앉아 무거운 얼굴로 논술시험을 준비하는 축들도 있다. 하지만 고교 3년 동안을 불면과 함께 잠들면서 준비해온 시험 결과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시험이 끝난 지금 아이들의 마음은 헛헛함으로 가득할 것이다. 학창시절 내내 모든 생활의 중심이 되어온 수능시험이 끝나고 난 뒤의 그 텅 빈 헛헛함 말이다! 그 '수능시험이라는 중심' 때문에 아이들은 학창시절 내내 친구들과의 영화보기가 편하지 않았었고, 더 큰 영혼의 성장을 위한 혼자만의 여행도 불편한 꿈속에서나 가능할 뿐이었다. 이처럼 학창시절의 모든 일상생활과 사고방식의 한가운데 있던 '수능시험'이라는 중심이 끝나고 사라졌으니, 그 헛헛함의 크기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헛헛함은 성장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할 통과의례일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의 텅 빔을 제대로 다루지 못할 경우 때 이른 허무감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저조한 시험결과와 만나면서 탈출구 없는 절망감을 낳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우리들의 삶이란 바로 그 헛헛함과 텅 빔의 연속이지 않은가! 그동안 우리를 키워온 것은 졸업/ 진학/ 방황/ 실패 속에서 생겨난 마음의 헛헛함이 아니었을까? 성장과정에서의 그 헛헛함들이 대나무처럼 삶의 마디마디를 이루면서 우리를 성숙케 하지 않았던가! 또한 청춘이란 수많은 좌절 속에서도 새로운 시도를 끊임없이 해나감으로써 아름답지 않은가! 그러니, 지금 졸업과 진학의 틈서리에서 헛헛함에 빠져있을 수험생들이여, 너희들 '텅 빈 마음'의 외연(外延)을 넓히고 넓혀, 건강한 삶의 공간으로 만들어나가거라, 헛헛함을 삶의 마디삼아 하늘로 치솟는 대나무들처럼, 혹은 혹독한 추위와 앙상함 속에서 화사한 내년의 봄을 준비하는 겨울산처럼.

길이 보이지 않는 겨울 산사의 어둠 속. 젊은 승려 하나가, 저녁예불을 알리는 범종을 울린다. 종소리가 깊다. 범종의 텅 빈 아가리를 휘돌아 나오는 소리는, 온 계곡과 온 산을 울린다. 스스로를 온전히 비웠기에, 그 소리는 저토록 크고 깊은가!

늦가을 산사의 범종소리가, 어두운 산길을 환히 비춘다.

김상묵(포항제철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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