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딱 90일만 더 살아볼까

딱 90일만 더 살아볼까/닉 혼비 지음/이나경 옮김/문학사상사

뉴스에서 고층 빌딩에서 떨어져 자살한 사람의 소식을 접하면 엉뚱한 상상에 사로잡히곤 한다.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 어, 이거 아닌데?'란 생각이 든다면 어떨까. 그 사람의 마지막 표정은 어떨까 하고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다.

이 책 역시 이런 질문에서 출발한다. 여기, 세 명의 사람이 12월31일 토퍼스 하우스 옥상에서 마주친다. 그 건물은 자살장소로 유명한 곳.

마틴은 열다섯살 짜리 여자애를 건드려 일자리도 잃고 이혼당했으며 교도소에도 다녀왔다.

모린은 중증장애아 아들을 둔 엄마로, 그 아이를 키우는 것이 너무 힘들다. 그는 아들을 요양원에 맡겨두고 세상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마틴은 사다리를 들고 옥상으로 올라가 술을 마시며 떨어지려고 준비하고 있다. 그 때 그 모습을 본 모린이 마틴에게 아는체 한다. 사다리를 빌려달라는 것. 마틴은 모린이 보는 앞에서 죽고 싶지 않아 망설이는 동안 또 다른 인물, 제스가 소리지르며 뛰어온다. 마틴과 모린은 열 여덟살 제스가 뛰어내리려는 것을 제압한다. 이때 피자 배달부가 옥상으로 올라온다. 피자 배달부 제이제이는 이민자로 쥐꼬리만한 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자신이 비참하다. 이렇게 자살 장소에서 만난 네 사람은 서로 자살을 방해받았다는 사실에 불쾌해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차피 죽을거 얘기나 좀 하자'면서.

이 소설의 시작은 이처럼 엉뚱하다. 일단 서로 우연히 자살 장소에서 만나고 나니 적어도 그날 밤만이라도 그 일을 보류하고 싶다는 집단적 욕망, 아니 부끄러움이 들었던 것이다. 이제 넷은 서로 얘기를 하고 서로의 문제를 풀어보기로 한다.

그들은 자살 데드라인을 90일 이후로 미뤄보자고 합의한다. 그동안 제스가 좋아하는 남자 채스를 찾아가 한 대 때려주기도 하고 모린을 위해 휴가를 떠나기도 한다. 이들은 자살을 하려는 순간 천사가 나타나 자살을 막아줬다고 신문사에 거짓 인터뷰하기도 한다.

90일 후, 90일 파티를 위해 다시 모였다. '자신에게 너무 엄격하게 굴지 말자'고 충고한 뒤 '어쨌든 지금 결정할 필요는 없잖아? 그럼 또 6개월을 두고 보는게 어때요? 어떻게 지내는지?'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자살과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유쾌한 수다 같은 이야기는 지독하게 불운하거나 제멋대로이거나 도무지 재기불능이거나 한심하기 짝이 없는 네 명의 주인공들에게 행복한 결말을 선사해낸다.

작가 닉 혼비는 불행에 처한 사람의 슬픔이나 공포에 대한 설명을 주인공 입장에서 감정몰입하지 않는다. 대신 발생한 사건을 최대한 간략하게 서술함으로써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가볍게 만들어버리는 기술을 발휘한다.

이들이 자살을 보류했던 90일동안 그들이 자살을 포기할 만큼 많은 변화가 있었던가? 아니다. 넷 모두 다시 그저그런 일상 속에서 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 그들이 깨달은 것이 있다. 자살할 용기가 없다는 것. 그 사실을 깨달은 그들은 함께 독서 모임도 갖고 여행도 하며 삶을 위해 조금씩 저축을 시작한다.

'자살할 만큼 비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뿐만 아니라 '일상이 지루하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추천할만한 소설이다. 네 명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보면 '내 인생도 살만하다'는 생각이 들지 모를 일이다.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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