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꿈 나의 삶, 김수학] 명예읍장이 되어

1982년 5월 장영자 사건 파동으로 인한 개각 때 국세청장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막상 옷을 벗고 나니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 그동안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을 그렇게 오랫동안 짊어지고 있었다는 생각에 퇴임식을 마치고 나니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먼저 들었다. 비로소 한가한 자유인으로서의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때부터는 나 혼자였다. 해방 후 약 40여 년간 해온 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다음날 아침, 고향인 경주로 내려갔다. 동네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운 친구들을 만나 동안 함께하지 못한 회포를 푸느라 막걸리 잔치를 며칠 계속했다.

어느 날, 내무부 지방국 관계관이 찾아와 명예읍장 제도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약 1년 동안 鄕里(향리) 외동의 명예읍장을 하게 되었고 또 밖에서 잠시나마 당시의 새마을운동을 관찰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하루는 읍의 농산계장이 찾아왔다.

"마을을 순회하면서 영농 교육을 해야겠는데 사람들이 잘 모이지 않아 걱정입니다. 명예읍장이 나오시면 사람들이 많이 모일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내키지는 않았지만 농산계장의 청에 못 이겨 마을을 돌며 영농교육을 하기로 하고 어느 마을로 들어섰을 때였다. 교육장 문 앞에서 한 노인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왜 들어가지 않고 여기 있습니까?"

"들어가면 뭐 하노, 맨날 듣는 거 또 들으면 뭐 하노…. 매일 그 말이 그 말 아이가. 영감 왔다고 해서 구경하러 왔소."

자연보호를 한다면서 주민들은 안 나오고 읍 직원들만 북 치고 장구 치면서, 행사 흉내만 내는 현장도 목격했다. 그 시대 상황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1979년 이전의 주민 참가 모습은 찾을 수 없었고, 세상은 이미 많이 달라져 있었다.

1년 남짓 시골에 있다 보니 자연히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동네 주민들의 울분 섞인 목소리를 직접 듣기도 하였고 사건 심부름하러 관청을 출입한 일도 있었다. 그때 읍 직원에게 들은 일선 행정의 고충은 정말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한 예로 국세청장직을 퇴임한 후 집 과수원에 물을 대기 위해 조그마한 못(池)을 파기 위해 시에 山地(산지) 형질변경 허가를 받으려고 사람을 시켜 먼저 도시과를 찾아가게 했다. 그랬더니 농산과로 가라고 했고 농산과에서는 또 녹지과로 가라고 했다.

서로 '이리 가라 저리 가라'를 거듭하며 '된다 안 된다' 하더니 결국엔 국도나 고속도로 주변 100m 안에는 형상 변경을 못 한다고 했다. 그 정도의 법은 나도 알고 있었기에 "도대체 그 법의 근거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무조건 '상부 관청의 통첩' 때문이라고만 했다.

혹시라도 이러한 불만이 지난날 현직에 있었기에 생긴 착각이 아닌가 곰곰이 생각도 해보았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고향의 명예읍장이라는 직책이 있고 전직 도지사인 나도 이런데 일반 민초들이야 오죽하겠는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결국 여러 곳을 헤매던 끝에 상부의 금지 '통첩'이 이미 실효됐다는 것이 확인돼 허가를 받게 된 일도 있다. 그 후 현직 도지사를 만나 여담으로 이런 얘기를 했더니 "잘 알면서 그러느냐 모두 선배가 가르친 것 아니오?"라고 농담을 하기에 한바탕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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