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릴레이 인터뷰)오창관 포스코 포항제철소장

포항 포스코 본사 11층, 북향(北向) 대형 통유리창 너머로 270만 평의 포스코 포항제철소가 한눈에 들어왔다. 오창관(55) 제철소장은 제철소를 가리키며 "자리를 맡은지 만 1년이 됐지만 저곳을 보면 항상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말했다. 또 뒷 벽면에 걸린 14명 선배 소장들의 사진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이런 말도 했다. "저 분들만큼만, 아니 조금만 더 잘할 수 있기를 바라고 기원하고 노력하겠다는 계획뿐이죠." 사진 속에는 이구택 현 회장을 비롯해 박득표, 강창오 전 사장 등 그야말로 쟁쟁한 포스코맨들이 들어 있었다.

▨숨어있던 개인사

오 소장에게는 월평균 40, 50매의 초청장이 온다. 지역의 웬만한 대소사(大小事) 거의 초청 받는다. 행사장에서 만나는 그의 차림새는 십중팔구 하늘색 근무복이다. "이렇게 입어야 행동이 제대로 된다."고 했다. 그를 지칭하는 "포스코맨이고, 엔지니어이고, 현장사람"이라는 말은 그의 팔자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개인사가 별로 드러난 게 없던데, 결혼은 언제 어떻게 했나?

▶처음부터 곤란한 걸 묻네. (잠시 주저하다) 친한 친구들은 나더러 소설같이 결혼했다고 한다. 아내(동갑의 여봉래 여사)와 고교 졸업 직전 하숙집 근처(그는 대구 출신으로 서울 휘문고를 나왔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만나 7년 연애 끝에 1977년 2월 26일 명동성당에서 결혼했다.

-그게 뭐 드라마틱한 이야기인가?

▶결혼식장에 우리 가족과 친인척 가운데 내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단 한 사람(끝내 밝히지 않았다)만 참석했다. 처가쪽도 비슷했다. 양가 모두 반대한 결혼식, 그래서 하객은 몇몇 친구·선후배들뿐이었다. 군대서 중위(ROTC출신)로 진급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하려는데 우리집은 우리집대로 아내와 처가가 성에 안찬다는 생각이었고, 처가 역시 백수나 마찬가지인 놈에게 금지옥엽 기른 딸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아직도 흔하디 흔한 얘기로 들리는데….

▶명동성당에서 결혼한 이유가 있다. 아내가 천주교 신자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성당 예식이 공짜였기 때문이다. 당시 가난했던 나는 비신자였는데, 신부님이 '참부모가 되는 길'이라는 강좌에 한 달 동안 빠지지 않고 나오면 공짜 결혼식을 집전해 주신다기에 개근했다. 그리고 결혼식 당일 우리 집안에서 '도둑결혼' 사실을 알고 '난입'할 것을 우려해 군대 후배들이 성당 바깥에서 인간 바리케이드를 치고 예식을 올렸다. 그 뒤 한동안 숨어 살았다. 이 얘기,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지금은 어떤가?

▶아내도 우리집에서 보물로 인정받고, 그 때 우리 결혼을 가장 완강하게 반대하셨던 장모님을 지금 우리가 모시고 산다. 이쯤이면 설명 다 된 것 아닌가? 나와 아내의 결혼은 성공한 작품이다.

-술·담배는 즐기나? 노래실력은?

▶담배는 하루 두 갑 반을 피우는 골초였는데 내 의지를 시험하기 위해 1997년 6월 25일 끊었다. 가끔 담배 생각이 날 때면 "상기하자 6·25" 하며 참는다. 술은, 주량(소주 1병 반)보다는 그 자체를 즐기는 편이다. 서울서 살 때는 아내와 양재천을 산책한 뒤 포장마차에서 '각 1병'을 월례행사처럼 했다. 서로 아깝다며 한 방울도 나눠먹지 않을 정도였다. 노래는 입사 초기에 음치였는데 허리에 소형 카세트를 차고 다니며 연습한 끝에 요즘은 별명이 '카수'다. 뽕짝에서 최신 댄스곡까지 섭렵한다.

▨제철소장 오창관

-거대한 조직을 맡고 있다. 휘하의 직원수를 즉답(卽答) 할 수 있나?

▶(웃으며) 나를 테스트하나? 매일 달라지는데, 오늘은 우리 직원이 7천150명이고 외주파트너(협력하청)사 소속이 7천950명이다.

-제철소 직원들과 담당 최고위 임원(제철소장) 간의 거리가 많이 좁혀졌다는 얘기가 많다.

▶과찬이다. 우선 포항에 있는 날은 매일 한 차례(주로 오후 3~5시) 이상 현장에 나가 직원들과 대화한다. 또 7천 명 직원 가운데 지난 1년 동안 해병대 훈련입소, 워크숍 등을 통해 주임·반장·50세 이상 등 고참 2천 명과 한 차례 이상 직접 부둥켜안거나 소주잔 나누는 식의 스킨십 기회를 가졌다. 올해도 그 정도 숫자를 계획하고 있다. 포항에서 발생하는 직원들의 직계 상사(喪事)에는 출장이 아닌 한 무조건 조문한다. 얼마 전 "입사 28년 만에 처음으로 소장과 밥 먹었다."는 현장 동료의 말에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의 미안함을 느꼈고, 현장경영의 각오를 더욱 다지는 계기로 삼게 됐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2003년 화물연대 파업사태 당시 담당임원이었고, 지난 여름 건설노조 사태도 직접 겪었다.

▶시기적 차이는 있지만 두 차례의 대형 파동을 보면서 가진 생각은 똑같았다. 내 사고의 정체성(正體性)에 혼란을 느꼈다. 할 말이 많지만 어렵게 봉합됐기에 말을 아끼고 싶다. 다시는 그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후배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기를 바라나?

▶'괜찮은 엔지니어, 신바람 나는 일터로 만든 사람, 하고 싶은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면 하는데…. 아직은 턱없이 못미치는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1987년 5월 7일이다. 광양제철소 종합준공식이 열렸다. 내가 광양제철소 설립 주역 13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 사업에 투입됐던 1983년 10월부터 1987년 10월까지는 정말 미친 듯 일했다. 내 인생의 절정기였다. 그리고 준공식을 지켜보는데…. 그 순간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부터 나는 '유·무형의 제철소 설계에는 내가 그래도 경쟁력이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포스코를 다시 한번 탈바꿈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는 PI분야에도, 감히 내 역할이 제법 있었다고 자부한다.

▨정해년 꿈

-올해 새롭게 세운 계획이 있다면?

▶요즘 자주 밤잠을 설친다. 이 자리(제철소장) 정말 녹록치 않다. 선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후배, 후배들에겐 일꾼으로서 존경받는 선배가 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개인적인 욕심은 없다. 오직 일로 승부하고 일에 시간을 걸려고 한다.

포스코맨들이 오창관 소장을 평가할 때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변화, 혁신, 현장경영, 다이내믹' 같은 것들이다. 그 스스로도 이런 평가에 대해 "그런 말 들으면 기분좋다."고 말했다. "작년에는 두 달 간의 공백(건설노조 사태를 지칭)이 있었는데 올해는 일에 묻혀 글로벌 포스코를 위해 뛰고 싶다."고도 했다. "제철소장에 취임하고 난 뒤 한자리에서 가장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고 말한 두 시간이 지나 시계는 오후 5시, 그는 옆에 있던 간부를 다그쳤다, "아이고, 오늘은 많이 늦었네. 빨리 제철소에 나가봅시다."

포항·박정출기자 jcpark@msnet.co.kr

※오창관 소장은

1952년 대구에서 태어나 휘문고와 한양대를 졸업한 뒤 1977년 포스코에 입사했다. 생산기술, 생산관리, 생산시스템분야에서 잔뼈가 굵어 생산기획실장을 지냈고 이것이 밑바탕이 돼 1999년 포스코의 업무시스템에 혁명적 변화를 불러 일으킨 PI(Process Innovation·업무혁신)를 주도했다. 2002년 상무로 승진했고 지난해 주총에서 포항제철소장(전무)에 임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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