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성지를 찾아서] 개신교⑧-순교자 주기철 목사

"오 주님! 저로 하여금 당신이 낮아진 것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지극히 높고 영화로운 하늘의 보좌에서 천사와 하늘의 영물과 성도에게 경배받던 만유의 주재자가 낮고 천한 사람이 되어 티끌 세상에 오셨나이다. 오시되, 왕후장상이 아니라 지극히 미천한 사람으로 말구유에 오셨나이다. 사람이 다 싫어하는 세리와 창녀의 친구가 되셨고, 어린 아이의 동무가 되셨고, 걸인과 문둥이의 벗이 되셨나이다. 마침내 벌거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셨나이다. 오 당신이 이같이 낮아졌는데, 저는 어떻게 하오리까? 어디까지 낮춰야 하오리까? 당신이 제자의 발을 씻기셨으니 저는 문둥이의 발을 핥게 하여 주옵소서. 당신이 세리의 집에 드셨으니 저는 사람 발에 짓밟히는 먼지와 티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신사참배를 거부한 주기철(1897.11.25~1944.4.21) 목사가 1939년 2월 2일, 2차 검속에서 풀려나 대구형무소에서 석방될 즈음에 내놓은 기도문의 일부이다. 기독교 유일신 사상에 어긋나는 일제의 천황제와 신사참배를 거부, 투옥에서 순교로 거듭되는 고난의 좁은 길을 선택한 주 목사는 예수사랑에 취한 참 신자, 참 목자, 참 순교자였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각오 순교일념으로 하늘나라의 영광을 차지했고, 한국 개신교사의 빛나는 별이 됐다.

◈ 기독 교리를 철저히 따르려 개명

장로교 목사이자 순교자인 주기철(朱基徹) 목사는 1897년 11월 25일 경남 창원군 웅천(요즘 진해)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기복'이었다. 평북 오산학교를 다니면서 '기독교 교리를 철저히 따른다'는 의미로 스스로 '기철'로 개명했다. 사람은 그 이름을 따라간다고 했던가. 신앙에 목숨을 받친다는 각오로 이름으로 바꾸고 실제로 주기철은 존경받는 삶을 걸어간 성자가 되었다. 개통학교를 거쳐 민족학교인 오산학교를 다니며, 주기철은 이승훈으로부터 민족구원의 메시아니즘을, 유영모로부터 경건과 신비주의를 배웠다.

◈ 예언자는 대중에 아부하지 말아야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초량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 주기철은 1932년 경남노회장에 피선됐다. 주기철은 금강산 장로교 총회 주최 목사수련회(1935년)에서 놀라운 발언을 했다. '예언자의 권위'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주기철은 "예언자라면 대중과 시대에 아부하지 말아야한다"고 강조했다. 세례자 요한이 죽음을 각오하고 헤롯의 불의를 고발한 일에 빗대 은근히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려는 일제를 비판했다. 현장에 임석했던 경관들이 주 목사의 설교를 중단시켰고, 모임은 해산했다. 그날이후 주 목사는 요시찰 인물이 됐다.

◈ 예수를 위해, 남을 위해 죽을 각오

1935년 12월에는 평양 장로회신학교 사경회에서 죽음을 불사하는 각오를 담은 '일사각오'(一死覺悟)라는 유명한 설교를 하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죽기까지 일생동안 남을 위하여 살다가 부활한 예수님처럼 죽음을 각오하고 이뤄야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주 목사 자신의 앞날에 대한 예고이자,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고귀한 결단을 담은 죽음의 설교였다. 아니 죽음을 넘어서서 영원히 사는 생명의 설교였다. 주기철은 예수를 버리고 사는 것은 죽는 길이오,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을 사는 길이라는 역설적 진리를 알고 실천했다. 복음을 지키기 위해 50만 성도가 로마제국의 칼날에 피를 흘렸듯이 우리도 그렇게 일사각오로 복음을 지켜내야한다고 강조했다.

◈ 신사참배 가결 후 옥살이 시작

'일사각오' 설교 이후 주 목사는 다섯차례, 총 5년 7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첫 구속은 1938년이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교세가 가장 컸던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는 비극이 빚어졌다. 그때 평북노회장은 일본 경찰 출신 김일선 목사였다. 신사참배가 결정되자 학생들은 격분해서, 평양신학교 뜰에 있던 김일선의 졸업기념 식수를 도끼로 찍어버렸다. 일이 시끄럽게 되자 불똥이 주기철 목사에게 튀었다. 한국교회를 이끄는 정신적인 원동력이 주 목사이었기에 주 목사를 옭죄어서 더이상의 신사참배를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주 목사는 사탄의 밥을 들지 않고, 육체가 고통을 당해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 사도 베드로조차 죽음이 두려워 세번이나 주님을 부정했는데, 일개 목회자에게 죽음이 왜 무섭지 않을까. 그래도 죽음보다 예수사랑이 더 컸다. 주목사는 점점 더 정금같이 단련돼 나갔다.

◈ 신사참배는 계명을 어기는 것

일각에서 "신사는 국가의례로서 종교가 아니므로 참배가 옳다"고 교회의 입장을 해명했으나 주기철은 신사참배가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1938년, 경북 의성에서 기독교사회주의조직체인 농우회가 농민계몽과 독립의식을 고취한다는 혐의로 적발되자 왜경은 이번에도 주기철을 엮어넣어 또다시 구속됐다. 1939년 2월 대구형무소에서 석방되자말자 주기철은 유언과도 같은 최후 설교 '오종목의 나의 기도"를 드렸다. 오종목은 다섯가지 기도지향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해달라 ▶오래 계속되는 고난을 견디게 해달라 ▶노모와 처자를 맡아달라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해달라 ▶내 영혼을 주님께 맡긴다는 기원을 담은 것이었다. 주 목사는 청죽(靑竹)처럼 변치 않고 푸른 기개를 지켜갔는데, 1939년 교회측은 주기철을 목사직에서 파면시켜버렸다. 최근 주 목사는 복권됐고, 순교현양사업이 이어지고 있다.

◈ 다섯번째 투옥중 하나님 나라로

일제의 탄압정책으로 주 목사의 구속은 되풀이됐고, 주 목사가 시무하던 평양 산정현 교회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상징성 때문에 폐쇄 명령이 떨어졌다. 그래도 주 목사는 흔들리지 않았다. 세례자 요한이 33세에, 젊은 스테파노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순교했듯이 그도 십자가의 희생양이 되기를 원했다. "풀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질 수는 없다. 다른 신 앞에 무릎꿇고 사는니 차라리 죽으련다."는 그의 신념은 확고했다. 1940년 9월 다섯 번째 투옥됐고,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밤, 주기철은 하나님 나라로 불려갔다. 일제가 천황을 신성시한 것에 대해 기독교적 유일신 신앙으로 무장하고 지켜낸 주기철의 장례식은 평양고보 정문앞에서 거행됐고, 유해는 평양 돌박산 기독교인 묘지에 안장됐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도 묘소가 있으나 빈무덤이다. 그가 간지 올해로 63년. 이제 주기철은 한국교회의 불멸의 빛이 됐다. 어린 주기철이 입교했던 경남 진해 웅천교회에는 순교기념관이 조성돼있다.

글 최미화 기자 magohalmi@msnet.co.kr

사진 정우용 기자 v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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