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오막살이에서 '부농 꿈'…필리핀 출신 에스트렐라씨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요. 한국말도 잘하고 싶고 한국음식과 한국문화도 많이 알고 싶고…. 그렇지만 가장 큰 희망은 부자가 되는 거예요."

상주 도남동 조그마한 집에서 부농의 꿈을 키우고 있는 에스트렐라 레이에스 김(31·estrella reyes kim) 씨를 만났다. 며칠동안 찬 겨울바람이 불어닥친 탓인지 에스트렐라 씨의 오두막은 사방이 바람을 막을 수 있는 비닐로 덧벽이 처져 있었다. 오두막 곁으로 하우스 3동이 나란히 서 있었다. 이 곳이 에스트렐라 씨와 남편 김점호(41) 씨, 두 딸 혜인(7)·혜선(5)이 등 네 식구가 오손도손 살을 부대끼며 부농의 희망을 키우고 있는 삶터다.

에스트렐라 씨는 필리핀에서 가난한 축산농가의 3남5녀의 일곱번째 딸로 태어나 대학까지 다닌 재원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수의학과를 졸업하고 수의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김 씨와는 1999년에 만나 결혼해 부산에서 살다가 2002년 남편이 사업 부도를 낸 뒤 필리핀으로 돌아가 2년 동안 살다가 지난해 8월 지금의 오두막에 정착했다.

그래서 결혼 7년을 넘겼지만 아직도 한국말이 서툴다. 덩달아 두 딸은 한글이 익숙하지 않아 사뭇 가슴이 아프다. 이 때문에 에스트렐라 씨는 낮에는 하우스 오이농사에 나서면서 밤이면 남편의 가르침과 텔레비전을 통해 한국 말과 글을 익히고 있다.

에스트렐라 씨의 하루는 바쁘고 고단하다. 새벽에 일어나면 곧바로 하우스로 달려간다. 남편의 오이 수확을 거들다 아침밥을 준비하고 아이들을 유치원 차에 태워 보낼 때까지 정신없이 보낸다.

온종일 하우스 안에 울려퍼지는 라디오를 친구 삼아 남편 김 씨와 오이 줄기를 살피고 가지를 솎아내고 다 자란 오이를 수확해 오후에는 원예농협으로 출하한다. 매일을 이렇게 오이 하우스에서 지내면서 그녀는 오이 박사가 다 됐다.

어쩌다 남편 손을 꼭잡고 장보기에 나서는 날이면 어김없이 중국음식집을 찾아 짬뽕을 먹는다. 그녀는 김치찌개나 매운탕 같은 얼큰하고 매운 음식을 한국 사람들보다 더 좋아한다.

요즘에는 주변 학교나 유치원 등에서 에스트렐라 씨를 영어 강사로 초빙하려 많이 찾는다. 영어과외를 해달라는 이웃 요청도 잦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거절하고 있다. 당분간은 오이농사에 전념하고 싶어서다. 어느정도 경제적 여유를 가지게 되면 가장 먼저 축산학이나 수의학 관련 대학을 다녀 전공을 활용할 생각이다.

다른 농부들과 달리 이들에겐 하우스 한 동 없다. 하지만 에스트렐라 씨는 매일 노란 오이꽃을 보며 소원을 빈다. "하루빨리 우리에게 하우스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언젠가 그녀만의 오이 하우스가 생겨 활짝 핀 노란 오이꽃처럼 해맑게 웃음지을 날을 기대해 본다.

상주·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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