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강유정의 영화세상] 오래된 정원

임상수 감독은 냉소에 탁월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냉소에 대한 감각'이라는 말이 의아할지도 모르겠지만, 냉소만큼 훈련이 필요한 표현도 드물다. 냉소는 곧잘 비방이나 비난 혹은 무목적적인 해코지로 변질되곤 한다. 그러니까 분명한 판단의 근거와 기준이 없다면 그것은 냉소의 기본적 소여를 결격한 것이라고 판단하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임상수 감독은 우리 나라 영화사에 희유한 흔적을 만들어가고 있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가족, 개인, 역사, 정치에 대한 뚜렷한 비판적 냉소의식으로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만들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1월에 개봉하게 된 '오래된 정원'은 임상수 감독의 정치적 냉소주의에서 길어올려진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오래된 정원'은 황석영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영화는 80년대 군부독재에 반대하다가 젊은 시절 내내 감옥에 갇혀지내야 했던 오현우의 출감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야기의 큰 줄거리는 도피자였던 오현우와 그를 은닉해주었던 시골 여교사 윤희의 사랑과 신뢰에 기대고 있다. 연인관계라기 보다 믿음 깊은 동지에 가까운 윤희와 현우의 만남은 시대의 상흔과 함께 지나간 80년대에 대한 멜로드라마적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눈에 띄는 것은 염정아가 맡은 윤희의 캐릭터인데, 운동권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목숨을 건 위험을 외면하고 현우를 받아준다거나 아이를 혼자 키워내는 모습은 우리 영화사에 없었던 새로운 면모라고 할 수 있다. 자칫하면 환상적이다 못해 관념적일 수 있는 윤희의 면모는 염정아의 적절하고 자연스러운 연기 덕분에 활력을 얻는다.

얼핏 암시했지만 실상 윤희의 면면은 현실적이라기 보다 이상적인 여인에 가깝다. 세월의 질곡에도 굴하지 않고 불치병 앞에서 굳건한 이 인물 윤희는 우리가 만나왔던 멜로적 감수성의 진부함을 쇄신한다. 선택에 주저함이 없고 죽으면 사라질 육체의 순결성에 큰 미련이 없다. 성녀이자 창녀의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윤희는 어쩌면 80년대의 정서, 폭력적이고 무시무시한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서자들이 바라는 공통의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어떤 점에서 '오래된 정원'의 주인공은 현우나 윤희가 아닌 80년대적 정서 자체라고 말하는 편이 옳다. 그들 주변에서 스러져갔던 청춘들, 임상수 감독은 그들의 혈기와 희생을 냉정하지만 격정적인 화면으로 그려낸다. 몸에 기름을 붓고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떨어져 내리는 법대생의 마지막 말, '뜨겁고 무섭다'라는 말은 그런 점에서 영화가 추구하는 이입의 지점을 잘 드러낸다.

간혹 화면을 바라보며 현재를 전하는 윤희의 목소리나 변절하거나 달라진 동료들을 바라보는 현우의 시선은 80년대를 추억하는 우리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 멜로 영화의 문법을 띄고 있지만 영화가 추억하는 순정의 대상은 한 사람의 개체가 아닌 추억과 아픔으로 남은 80년대 자체에 가깝다. 추억 속에서 지나온 과거는 아픈 현재의 흔적들과 조우한다. 멜로적 감수성으로 소비되어진 80년대에 대한 반성도 여기서 비롯된다.

임상수 감독의 '오래된 정원'은 감독이 냉소주의를 버리고 객관적 동정주의로 돌아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내내 이 뜨거운 동정으로 풍부하다. 80년대의 흔적을 공유한 자들에게 이 작품이 상흔처럼 아프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아픔은 그렇게 영화 속 화면으로 유전되고 확장된다. 호명의 순간 과거는 늘 현재가 되는 법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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