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다소 차이는 있지만 한번 남겨진 상처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견딜 수 없는 상황을 못이겨 어떤 형태로든 청소년기 일탈을 저지르기도 하고, 성인이 돼서야 정신적 문제가 불거지기도 한다.
여기 한 사례가 있다. 지난해 봄 한 가정폭력상담소에 60대 할아버지가 찾아왔다. 부부싸움 때문에 경찰이 출동했고, 급기야 사건으로 불거져 검찰에서 교정치료프로그램에 의무적으로 참여하라는 처분을 받았다는 것.
할머니와 함께 프로그램에 참여할 것을 종용했지만 할아버지는 막무가내였다. 프로그램을 마친 뒤 한달도 채 안 돼 할아버지는 같은 이유로 다시 찾아왔다. 담당자는 할아버지를 설득했다. 혼자만 바뀐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부부가 서로 노력해야 한다고. 결국 부부는 함께 교정치료프로그램을 마쳤고, 이후 할아버지의 손찌검도 사라졌다고 했다. 하지만 새로운 문제가 등장했다. 이들 부부의 두 아들. 얼마 전 둘 다 결혼해서 가정을 이뤘는데 수시로 다툼을 하고, 또 며느리들에게 손찌검한다는 것이었다. 부모의 모습을 보고 그대로 배운 것이다. 자식들만큼은 남부럽지않게 훌륭히 키웠다고 생각했던 노부부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들 부부는 아들과 며느리를 불러 상담을 받고 치료프로그램에 참여할 것을 신신당부했다. 반신반의하던 아들 내외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변한 모습을 보며 올해부터 꼭 참여해보겠다고 약속했다.
영남가정폭력상담소 박경규 소장은 "가정폭력을 보며 자란 자녀들은 어린 시절 문제가 없는 듯 보이다가도 갈등상황이 빚어지면 부모를 모방한다."며 "수십년간 지속된 가정폭력을 지켜본 자녀들에게는 당연한 결과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곳의 상담건수는 지난 2003년 600여건에서 지난해 1천200여건으로 두배 가량 늘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법원'검찰 처분을 받아온 경우다.
가정폭력 관련 특별법이 제정 및 개정되면서 국가가 적극 개입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사각지대는 남아있다. 바로 가정폭력의 틈바구니에서 신음하는 아이들이다. 국내 가정폭력 상담프로그램 중 거의 대부분은 부부를 대상으로 한다. 보이지 않는 상처를 입은 아이들을 보듬어주고 치료해주는 것은 부모의 몫으로 남아있다. 부부 문제가 해결되면 자녀들도 자연스레 치유될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한번 입은 상처는 깊은 흉터마냥 아이들의 뇌리 속에 자리잡아 수면 아래 가라앉을 뿐이라는 것이다.
영진전문대학 유아교육과 최미희 교수는 "과잉행동, 정서장애, 주의력 결핍 등 문제를 안고 있는 아동들이 수년 전만 해도 200명당 한두명 꼴이었는데 최근엔 20~30명당 한 명꼴로 나타난다."며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분위기, 싸늘하게 식어버린 부부 관계 속에 자란 아이들은 좋고 나쁨에 대한 감정 표현이 서툴고, 친구와의 갈등에서도 폭력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가정폭력에서 무기력하게 방치된 아이들이 스스로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고 말한다. 싸움을 말릴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혼자만의 공간을 찾아 철저하게 고립되거나 또는 싸움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려 자책하기도 한다는 것. 이런 과정에서 유아기'청소년기의 특징 중 하나인 자아실현의 욕구는 묵살되고, 욕구를 억누르고 피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버린다.
대구미술치료연구소 전태옥 소장은 "유아·아동기에 내부에 쌓여있던 분노와 갈등이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폭발해 가출하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사례를 많이 보게 된다."며 "특히 유아나 아동의 경우, 자아실현의 욕구를 억누르는데 에너지를 쏟다보니 정작 학교 생활은 무기력해지고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거나 될대로 되라는 식의 허무감에 빠져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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