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막다른 길 끝에서 세상과 소통하다' ...승부역

철도 승부역은 경상북도와 강원도의 경계에 있다. 경북 봉화군 석포리. 하루 35대의 기차가 지나고, 상행선과 하행선을 합쳐 6대의 객차가 30초씩 머문다. 2평이 안 되는 간이 대합실은 철길과 철길 가운데 있고 승부역에서는 표도 팔지 않는다. 버스 타듯 기차에 오르면 안에서 역무원이 계산해준다. 역사 뒤편으로 굴뚝에서 연기를 뿜어 올리는 집이 보인다.

승부역은 막다른 길 끝에 있다. 앞은 낙동강 상류가 굽이쳐 흐르고, 뒤는 산으로 막혔다. 다니는 버스는 없다. 산길엔 콘크리트 포장을 했지만 버스가 다니기에 좁고 가파르다. 이곳 사람들은 오직 기차로 바깥 세상과 소통한다. 승부역 주변엔 학교마을(예전에 학교가 있었다고), 역마을(승부역 뒤에 있다고), 승부마을을 합쳐 30여 가구, 50여명이 산다. 대부분 70대, 80대 노인들인데, 무, 배추, 두릅, 메밀밭 등이 생업이다.

이 역에도 몇 해전까지는 고정 고객이 있었다. 승부역을 통해 태백으로 통학하는 초등학생 2명, 그러나 지금은 떠났다. 그렇다고 영 손님이 없는 것은 아니다. 4일과 9일 춘양역으로 장보러 나가는 인근 마을 노인 10여명이 이 역에서 기차를 타고 내린다. '하늘도 세평, 꽃밭도 세평.' 그러나 이 작고 고요한 간이역은 세상과 은밀하게 소통하고 있었다.

승부역은 기차로 갈 길이지, 자동차로 가기는 어렵다. 농촌엔 이정표도, 물어볼 사람도 드물다. 봉화의 한 식당에서 만난 중년 남자가 가르쳐 준 산길은 막다른 길이었다. 막다른 길 끝에 사는 주민은 '철길을 따라 4km만 걸으면 승부역에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중간에 터널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덧붙였다. 기차와 만날지도 모를 철길 터널을 걸어서 가라고? 개가 그렇게 짖어도 내다보지 않던 집주인의 여유를 짐작할만했다.

승부역 가는 길은 험하지만 운치 있다. 사라지고 나타나기를 거듭하는 철길과 길 왼쪽과 오른쪽으로 번갈아 나타나는 낙동강 상류는 말 그대로 절경이다. 강물에 길들여진 하류의 돌멩이나 바위와 달리 이 곳 상류의 바위와 돌은 야생 그대로 울퉁불퉁하다. 큰비 내리면 언제라도 떠날 준비를 하는 냥 앉은자리도 불안정하다. 통나무 운반하는 구식 트럭을 볼 수 있고, 언제 내렸는지 알 수 없는 눈이 칼바람에 날린다. 운치 있지만 길이 구불구불하고 가팔라 눈 내린 날엔 자동차로 가기 어렵다.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 승부리에 들어서면 고랭지 채소밭이 보인다. 이 곳이 고지대임을 증명하듯 야산을 갈아 만든 밭들은 불룩 나온 배처럼 둥글다. 배추 값이 떨어져서 그런가, 제때 뽑지 않은 배추가 을씨년스럽다. 승부역은 봉화군 석포면에서도 낙동강을 따라 삼십 리를 들어간 간 길 끝에 있었다.

앞으로 낙동강 상류와 험준한 산이 둘러싸인 이곳. 역과 승부 마을 사이에는 '출렁다리'가 놓여 있다. 2003년 11월 건설한 현수교로 폭 1.5m, 길이 70m짜리다. 사람만 건널 수 있고, 차는 다닐 수 없다.

'승부역은!

하늘도 세 평, 꽃밭도 세 평이나,

영동의 중심이요, 수송의 동맥이다.'

1960년대 이 작은 역에서 근무했던 철도원이 철로변 바위에 흰 페인트로 남긴 글씨다. 이 험준한 산골에 뚫린 공간이라고는 하늘뿐이다. 그 하늘마저도 산에 가려 좁다. 그러나 산골 간이역에 근무했던 철도원의 자부심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이 작은 역을 '영동의 중심, 수송의 동맥'으로 표현했으니 말이다.

세 평 꽃밭 바위벽에 시를 썼던 철도원의 자부심은 과장이 아니다. 승부역은 1955년 개통이후 태백광산지역의 지하자원을 실어 나르는 국가의 대동맥이었다. 영암선(영주∼철암간 87km)은 건설회사와 군 공병대가 투입돼 건설한 대공사였다. 1949년 착공돼 1955년 12월 30일 완공했는데, 험한 척량산맥을 뚫고, 수많은 강을 건너야 했다. 다리 55개, 터널 33개로 전체 구간이 20%가 다리와 터널이다. 그 중에서도 승부역 근처의 공사가 가장 난공사였다고 한다. 이승만 초대대통령이 이 작은 역에서 영암선 개통을 축하하고, 친필 기념비를 남긴 것도 이 때문이다. 기차를 타면 영암선의 비경을 고스란히 즐길 수 있다.

이 활기찬 역은 그러나 세월 따라 잊혀졌다. 광부들이 떠났고, 주민들도 떠났다. 지금 승부역 인근 3개 마을엔 30여 가구에 노인들만 남았다. 개통 당시 보통역으로 출발했지만 1997년 역원이 배치된 간이역으로 격하됐고, 한 달 뒤부터 인근 석포역에서 관리했다. 2001년 열차 신호만 취급하는 신호장으로 격하됐던 승부역은 2005년 다시 보통역이 됐다.

승부역이 보통역의 지위를 찾는데는 산골오지의 눈이 한몫 단단히 했다. 1998년 12월부터 서울 청량리 역을 출발해 강원도 추전역을 오고가는 '환상선 눈꽃'열차가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이 승부역이기 때문이다. 체류 시간 한 시간 반 가량이지만 관광객이 가장 머물고 싶어하는 곳이 됐던 것이다. 그 후 대구, 대전, 군산 등지에서도 겨울엔 눈꽃 열차가 다니기 시작했고, 해맞이 열차, 산나물 열차(봄), 피서열차(여름), 단풍열차(가을) 등이 계절에 맞춰 생겨났다. 특별열차가 들어올 때면 역사 앞 강변에서는 먹거리 장터도 열린다. 역사 앞 강변에는 포장마차 형태의 간이 건물 20여동이 있다.

승부역은 겨울엔 눈으로, 여름엔 피서지로 각광 받는다. 낙동강 상류의 힘찬 물결과 비경이 예사롭지 않다. 매년 정동진 해맞이 열차를 타고 온 서울 손님들은 돌아가는 길에 승부역에서 내려 두메산골의 겨울풍경을 즐긴다.

승부역과 마을을 이어주는 70m짜리 '출렁다리'도 걸어 볼만하다. 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인 메밀꽃 단지와 두릅단지도 계절만 잘 맞추면 좋은 구경거리가 될 성싶다. 승부역 건너편엔 등산로가 나 있고, 산악자전거 동호인들이 자주 찾는 MTB 코스(승부마을 뒷산∼현동 야영장)도 있다. 승부역 인근 신기역에서는 그 유명한 환선굴을 구경할 수 있다. 승부역을 다녀온 사람들은 그곳 역무원과 나누는 이야기가 재미있었다고 했다.

문의) 승부역 054)673-0468.

◇ 승부역 가는 길

△ 기차(무궁화호)-동대구(06시 30분 출발)→승부역(10시 05분)→강릉역(12시 30분)

△ 돌아오는 기차-강릉역(15시 30분 출발)→승부역(17시 52분)→동대구(21시 43분)

△ 자동차-대구→중앙 고속도로→영주IC→봉화→동해·태백, 울진 갈림길에서→동해·태백방향→현동→석포.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