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제 살롱] 조상문 ㈜네오텔레콤 사장

조상문(45) (주)네오텔레콤 사장은 요즘 재기의 꿈에 부풀어 있다. 이동통신 시장의 활황과 함께 통신장비 제조업체인 네오텔레콤이 '제 2의 전성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3년 전 부도위기 직전까지 몰렸던 당시를 생각하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덩달아 작년에는 정보통신부로부터 올해의 IT기업인으로 선정돼 장관상까지 받았다. 이제 재기의 날개를 펴는 일만 남았다.

조 사장은 고교 출신 엔지니어 사업가다. 안동 출신인 그는 구미전자공고 졸업이 정규 학력의 전부다.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전까지 경력이라곤 삼성전자에서 근무한 경력 뿐이다. 요즘같이 잘 나가고, 있는 집안의 자녀들이 주로 성공하는 시절에 찾기 힘든 이력의 소유자다.

그가 처음 사업을 시작한 것은 지난 95년 6월. 고교 동기들과 함께 시작한 첫 사업은 전국 면허시험장에 시스템을 공급하는 사업. 시스템 공급을 위해서는 먼저 경찰청이라는 거대 조직을 뚫어야 했다. 하지만 무일푼에 오로지 기술력 하나로 승부해야 했던 당시로서 경찰청에 시스템을 납품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돈과 인맥 부족'이라는 핸디캡도 그의 '뚝심'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그는 "당시 2년여 동안은 거의 미친 듯이 뛰어다녔습니다. 기술력 하나면 된다고 생각하고 밤낮없이 매달렸습니다. 다행히 운이 따랐는지 경찰청에서 삼성과 LG, 카이스트 등에서 제안한 시스템 대신 제 안을 받아들였습니다."라며 사업 입문 동기를 설명했다.

이후에는 사업이 탄탄대로였다. 다락방 사무실은 서울 송파의 IT단지 내 번듯한 사무실로 이전을 했고 직원 수도 200명에 이르렀다. 이동통신 중계기 사업에 뛰어들면서 매출은 단번에 300억 원을 넘어섰다. 지난 97년 SK텔레콤의 무인기지국 원격 환경감시 시스템을 수주할 때는 "맨주먹으로 경찰청도 상대했던 내가 이거 하나 못 따겠나."는 생각이 들었단다.

하지만 이처럼 잘 나가던 그에게도 위기가 닥쳤다. 2001년부터 시작된 이동통신 사업자의 투자 축소는 그에게 거의 결정타를 먹였다. IMF 위기 때도 "구조조정은 없다."면서 자신의 사재를 털어 직원 월급을 충당하며 위기를 넘긴 그지만 이 때는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2003년 11월부터 만 1년 사이에 그는 1차 부도를 세 번이나 맞았다. "회사가 적자를 내기 시작하자 은행은 즉시 대출을 회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은행은 '비오는 날 우산을 뺐는다.'고 하더니 그 말이 실감 났습니다. 실제로 하늘이 노란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런 그에게 회생의 기회가 마련된 것은 2005년 들어서면서부터. 통신 중계기 사업에 투자하겠다는 투자자를 만난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의 투자도 정작 필요할 때는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이 분은 회사를 부도내고 새로 시작하자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작 부도위기에 몰렸을 때 필요한 돈이 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 회사 부도는 온전히 저의 힘으로 막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라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부도위기를 막고 회사를 정상화 시키자 이제 투자가 본격화됐다. 덩달아 이동통신 시장도 재차 붐을 이뤘다. 그 때까지 책상도 없는 공장에서 생활했던 그에게 재기의 기회가 마련된 것이다.

부도 직전 몇 십억 원 수준에 불과했던 매출도 작년부터 300억 원대를 회복했다. 물론 이동통신 중계기 시장이 살아나기도 했지만 그의 재기에는 그동안 꾸준히 계속해 왔던 기술투자가 한 몫을 단단히 했다. 통신 중계기 외에도 방범서비스용 ADSL 단말기, 와이브로 등 신규 분야에도 진출했다. 이런 기술력 덕에 올해는 산업자원부로부터 전력 핵심기술 개발을 요청받아 놓고 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자신의 꿈이 '전경련 회장'이라고 말했다. 좀 '느닷없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는 "대기업 총수만 회장을 하면 안됩니다. 이제는 중견기업이 페어플레이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게 중요합니다. 그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상곤기자 lees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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