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성지를 찾아서] 불교⑩-천등산 봉정사

겨울이면 안동 봉정사를 찾고 싶다. 투명하게 시린 하늘을 이고, 천등산 기슭에 자리잡은 봉정사는 구릉형 사찰로 그리 넓지 않은 사역을 오밀조밀하게, 치밀하고 정감이 넘친다. 가만히 난간에 앉아서 마음을 씻기에 좋은 봉정사는 평일에 찾는 게 낫다. 영국 여왕이 다녀간 뒤로 유명세를 타는 바람에 자칫 단체 관광객들과 맞닥뜨리면 제대로 봉정사의 고졸한 아름다움을 느껴볼 수도 없다.

여타 거찰과는 달리 천등산(天燈山) 자락에 그저 겸손하고 아담하게 불국정토를 지향하는 사부대중의 뜻을 담은 봉정사(鳳停寺)는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접어보낸 종이봉황이 남서쪽으로 흘러내리다 날개를 접고 쉬고 있는 곳이라는 뜻을 지녔다. 결코 뽐내거나 거만하지 않기에 일주문을 들어서면 욕심이 느껴지지 않는 청빈함이 느껴진다. 떼서리로 우르르 몰려다녀서는 봉정사 특유의 무소유 정신과 고졸한 아름다움을 알지 못한다.

여왕이 다녀간 길이라고 해서 퀸스로드로 이름붙여진 솔숲 길을 지나, 불현듯 솟아오르듯이 마주치는 일주문을 지나 상수리 나무 숲으로 하늘을 가린 50여 미터의 언덕을 오르면 통일신라 이후 조성되는 구릉형 사찰의 전형인 봉정사 경내이다.

오른쪽으로 휘어져 나타나는 약간 급하다싶게 비탈진 이끼 낀 돌계단을 끼고 대웅전과 영산암 등이 들어서 있는 봉정사는 오래 수도한 고승대덕에서 자연스레 빛이 뿜어져 나오듯이 그렇게 따뜻하고 추억이 많을 듯한 그런 불교 성지이다.

◈ 최고(最古) 건물 봤다는 자만심 버려야

봉정사를 찾아오는 이들이 쉽게 빠지는 함정(?)이 하나 있다. 바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봉정사 극락전, 국보 제15호)을 봤다는 단순한 성과주의이다. 우리나라 목조건물의 대명사로 알려진 극락전을 마주하면 대부분 순례객들은 거기에 스며있는 정신은 보지 않고, 껍데기인 건물만 휑하니 둘러보고 끝내는 비율이 적지 않다. 물론 봉정사 극락전은 앞면 정면에만 문이 있고, 나머지 3면에는 문이나 창이 전혀 없는 감실형 건물로 13세기에 만들어진 현존 최고 건물임에는 틀림없다. 봉정사 극락전의 닫집(법당의 불상 위에 설치되어 있는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운 집안의 집) 역시 가장 오래된 닫집 가운데 하나로 유명하다. 그러나 정작 더 중요한 것은 봉정사 극락전이 지닌 속뜻이다.

◈ 중생이 원하는 건 지극한 행복

사바세계에서 고해에 부대끼는 중생은 누구나 지극한 행복을 원한다. 그렇기에 중생은 살아서 번뇌의 미혹에 빠지지 말며 죽어서는 극락에 가기를 원한다. 이 서방극락정토를 축소시켜 놓은 법당이 바로 극락전이다. 봉정사 극락전은 가공석 및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겹처마로 구성, 매우 간결한 아름다움을 지닌다. 극락전 한가운데 불단에는 좌우 협시보살 없이 아미타불이 봉안돼있다. 어떤 사람이 아미타불의 이름만 들어도 무명에 휩쓸리는 죄를 면하게 된다는데, 열심으로 아미타불을 외면 그 공덕은 더해진다. 이제부터 봉정사 극락전에 가면 적어도 한 가지 복업은 아미타불 앞에서 닦고 가는 것은 어떨까? 무량한 빛 그 자체이며, 무량한 수명 그 자체인 아미타불이여, 우리에게 불멸의 생명을 가르쳐주소서.

◈ 감동을 자아내는 대웅전도 있어요

봉정사에 가면, 명성에 비해 다소 단촐한 극락전에 비해 "아!"하는 감동을 자아내는 감미로운 건물을 만나게 된다. 바로 대웅전(보물 제55호)이다. 우리가 현란한 단청이나 거창한 규모보다는 약간 퇴락함으로써 역사성과 고졸미를 지닌 사찰을 찾아보기를 원한다면 바로 봉정사 대웅전이 제격이다. 봉정사 대웅전은 오랜 연륜에도 흔들림 없이 편안함과 따뜻함 그리고 그리움을 품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대웅전 앞 툇마루가 달려있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불단 위쪽에는 구름이 둥실 떠 있는 하늘을 두 마리의 황룡과 백룡이 날아가는 모습을 그려 하늘의 신비함과 권능을 표현한 보개가 달려있다. 보개 아래 석가모니불 뒷벽에는 벽화가 조성돼있는데, 이 후불벽은 조선불화연구의 중요자료로 곧 완공될 사찰박물관에 전시될 예정이다. 대웅전 기둥에는 승천하는 용을 그려 장엄했다. 석가모니불 뒤에 걸린 후불탱화는 1713년에 제작된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이다.

◈ 깨어 있어라, 깨어 있어라

봉정사 경내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자연석 돌계단이다. 돌계단에 올라서면 강당으로 쓰였던 만세루의 처마선이 봉황의 날개인 양 우아하게 깃을 펴고 있다. 만세루에는 불전사물(佛殿四物)이라는 범종 법고 운판 목어 가운데 법고 운판 목어가 놓여있다. 모든 축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울리는 법고, 공중을 날아다니는 중생을 제도하고 허공을 헤매며 떠도는 영혼을 천도하는 운판, 그리고 물속에 사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목어가 새벽 예불에 맞춰 울려진다. 봉정사 만세루 목어는 말한다. "눈을 뜨라, 눈을 뜨라, 물고기처럼 항상 눈을 뜨고 있어라. 깨어 있어라. 깨어 있어라. 언제나 혼침과 산란에서 깨어나 일심으로 살아라. 그와 같은 삶이라야 너도 살고, 남도 살리고, 너도 깨닫고 남도 능히 깨닫게 할 수 있다." 목어가 입에 문 여의주처럼, 우리도 대자재를 얻는 보살이 되는 날은 언제일까.

◈퇴락하는 여유를 즐기는 봉정사 부속암자

봉정사 경내는 세 권역으로 이뤄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세루 정면의 대웅전 왼쪽 화엄강당(보물 제448호, 현재 종무소), 오른쪽 무량해회(승방)가 만들어내는 권역, 만세루를 지나 대웅전 앞마당 석축을 오르지 않고 왼쪽으로 몸을 옮기면 정면으로 극락전(국보 제15호), 왼쪽으로 고금당(보물 제449호, 선원), 오른쪽으로 화엄강당 뒤편이 만들어 내는 권역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나머지 하나의 권역은 부속암자인 영산암이다. 우화루 아래 계단을 올라서면 바위 속에 자라는 소나무가 일품인 영산암은 사찰이라기보다 사대부가의 아름다운 정원처럼 뛰어난 미를 갖추고 있어서 1987년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동승' 등 영화를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여유롭게 퇴락을 즐기는, 곱게 늙어 가는 절집의 자연주의 미학에 세계인이 공감한 바로 그 현장이다.

글·최미화기자 magohalmi@msnet.co.kr

사진·정우용기자 vin@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