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없는 설움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60년대의 이야기다. "아이가 셋이라는데 누가 방을 내주겠소?" 집을 구하려 다니다가 그런 말을 듣고 돌아서는 내자의 모멸감을 나는 알지 못했다. 늘 업무에 좆겨 이사를 가는지 마는지 도통 집안일은 내자에게만 맡겼던 터였다.
내자가 문간방만을 고집했던 이유는 우선 값이 싸고 매일 퇴근이 늦는 내가 주인 눈치 없이 들락거리기 쉬우리란 계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인 할머니는 아이들이 화장실에 소변을 보다가 조금이라도 흘리면 싫은 소리를 대놓고 하였고 사사건건 내자에게 잔소리를 하였다.
옆방에는 젊은 부인이 혼자 아이 둘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술집 출입을 하던 그 여인도 내자를 괴롭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말없이 간장을 퍼가는가 하면 밤이면 술에 취해 우리 방 쪽마루에 앉아 같이 술을 마시자고 유혹(?)하기도 했다. 내자는 월세기간 6개월이 지나자 또 이사를 감행했다. 비원 앞 권농동으로 갔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자 집을 새로 수리한다고 하여 그 집에서 또 쫒겨나게 되었다. 이번엔 교동 초등학교 뒤편 가회동의 문간방이었다. 이사하는 날, 내자가 사무실로 전화를 했다.
"오늘 이사가예. 이따가 밤 9시에 요 앞 빵집 앞에서 기다릴께예."
나는 '또 이사를 하는구나'라고만 생각했을 뿐 이내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날 밤, 소주를 한 잔 걸치고 집 앞에 이르러 여느 때처럼 큰 소리로 외쳤다.
"내다, 문 열어라!"
그러자 옆방 사람이 나오더니만 우리 집이 이사를 갔다고 했다. 그제서야 아침에 내자가 했던 말이 기억나 부랴부랴 빵집 앞으로 가보았으나 시간은 벌써 밤 11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게 문을 닫으려는 빵집 주인에게 물었더니 이사 간 집 약도를 대충 그려주었다. 그날 나는 겨우 통행금지 직전에 새로 이사한 집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집 역시 부엌이 없어 내자는 쪽마루 밑의 아궁이에 솥을 얹고 밥을 해야 했다. 더구나 문간방이니 사람이 오갈 때면 내자는 밥을 하다가도 길을 비켜주어야 했다. 주인 아주머니의 성질 또한 고약스러웠던 그 집도 6개월이 지나자, 방을 비워 달라고 했다. 주인은 월세를 올릴 심산이었으나 아무리 쥐어짜도 여유가 없던 우리는 또 이사를 해야 했다. .
원서동으로 이사를 또 하게 되었다. 그 집에서 나는 행정과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행정과장은 관용차로 스리쿼터를 이용할 수 있었는데 주인집에서는 그 차를 못마땅해 했다. 출근 시간, 기사가 도착했다는 표시로 울리는 클랙슨 소리가 시끄러워 아이들이 잠을 깬다는 것이 이유였다.
김장도 제때 하지 못해 돈이 생길 때마다 내자는 세 번에 걸쳐 김장을 하곤 했다. 주로 남들이 김장을 끝낸 동지섣달, 눈이 펄펄 오는 길에 내자는 얼어터진 배추들을 사다가 김장을 했다. 김장거리를 사기 위해 내자가 금반지를 팔았다는 사실을 나는 한참 후에 알았다.
내자의 속을 더 상하게 만들었던 것은 주인집 텔레비전이었다. TV를 보기 위해 온 동네 아이들을 주인 딸들이 괄시를 했다. 뿐만 아니었다. 수돗물이 밤에만 나와 주인집에서 먼저 물을 받은 후 밤 12시가 넘어서야 내자 차례가 돌아왔다.
6개월이 지나 그 집의 계약기간이 또 끝났다. 다시 이사를 해야 했다.
이번에는 정말 더할 나위 없이 낡은 집이었다. 어찌나 지저분하던지 벽이며 사방이 온통 새카맸다. 우리 아이들은 지금도 그 집을 "까만 집"이라고 부른다.
아이들은 무 筍(순)처럼 푸르게 자랐다. 아이들이 고 3이 되었을 때 내자는 전세 집을 정리하고 안국동에 대지 37평에 건평 17평짜리 한옥 집을 하나 샀다고 했다. 긴긴 문간방의 설움이 마침내 막을 내렸다.
김수학 전 경북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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