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세계에 존재했던 어느 왕조보다 임금 독살설이 많다. 조선왕조가 다른 왕조에 비해 유달리 길었다는 데 원인이 있다. 조선은 1392년에 건국돼 1910년까지 무려 518년을 존속했다. 일본열도에 등장했던 무사정권이 짧게는 150년에서 길게는 260여년, 중국 대륙에 등장했다가 사라진 국가들이 160여 년에서 300여년 존속됐던 것에 비하면 훨씬 길다. 역사가 장구하니 임금 독살설이 많은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오로지 긴 역사 때문에 임금 독살설도 많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조선은 27명의 임금 중 무려 8명이 독살설에 휘말려 있고, 소현세자와 사도세자까지 포함하면 10명이 독살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은밀한 독살이 아니라 공개적인 독살, 즉 반정까지 포함하면 더 많다.
어째서 그런가?
독살과 반정은 비정상적인 왕위 계승이란 점에서 비슷한 정치행위이다. 이 책은 비정상적인 왕위계승은 조선의 정치체제가 비정상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급속도로 쇠약해졌다. 임진왜란의 결과 명나라와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은 무너졌다. 그러나 그 전장의 중심에 있었으며 가장 큰 피해를 보았던 조선은 멸망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은 이미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양반들로 골치를 앓는 나라였다. 나라가 그런 지경이니 외부침략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조선은 망하지 않고 3세기를 더 버텼다. 비정상적인 생명연장에 들어간 것이다. 이 같은 비정상적 생명연장의 결과로 드러난 것이 바로 국왕 독살이다. 실제로 독살설에 휘말린 8명의 군주 중 7명이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를 비롯해, 임진란 이후의 임금들이다.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반정 역시 임진란 이후에 발생했다.
물론 국왕의 힘이 일본의 쇼군이나 중국의 황제에 비해 약했던 것도 수많은 독살설의 이유였다. 중국의 황제는 행정은 물론 정치·경제·군사 모든 부분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따라서 신하들의 정적은 당파가 다른 신하들이었다. 그들은 황제 앞에 엎드려 상대편 세력을 견제했다. 중국에서 신하가 권력을 두고 황제와 다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의 쇼군 역시 그랬다. 쇼군은 지방의 다이묘들에게 할복을 명할 수 있었고, 영지를 빼앗을 수도 있었다. 물론 이 같은 시스템이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힘의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은 달랐다.
조선의 국왕은 신하들로부터 끊임없이 견제를 받았다. 신하들은 당파를 갈라 싸웠으며 임금이 자신의 당파와 맞지 않을 때는 복종을 거부하기도 했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사대부들은 임금의 명령보다 당론을 우선했다. 조선의 신하들은 눈을 내리깔고 임금 앞에 엎드려 있었지만,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그 결과가 반정이나 독살이었다. 임금의 신하임명이 아니라 신하에 의한 택군(擇君)인 셈이다.
독살설이 있는 임금의 배후에 언제나 반대 정당이 존재했으며, 숙종 즉위 때를 제외한 모든 임금은 죽은 뒤 반대 정당이 집권했다는 점이 이를 방증 한다. 따라서 조선의 임금은 전지전능은 커녕 당파와 당파 사이에서 줄을 타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 책은 단지 선정적인 제목으로 독자를 끄는 책이 아니다. 조선의 국왕은 왜 독살 돼야 했을까. 독설이라는 키워드를 따라 조선 국왕의 위치와 조선의 정치체제, 당쟁 등에 관해 흥미롭게 이야기를 풀고 있다. 이 책은 또한 우리가 학창시절 제대로 '국사'를 배우기는 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 책은 조선의 흥망성쇠 과정을 '왕 독살'을 바탕으로 인과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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