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아내는 몰래 담배를 피웠다. 남편은 담배 피우는 아내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팼다. 아내는 집에 담배 냄새가 스며들지 않도록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웠다. 그런데도 남편은 눈치를 챘다. 아내는 남편의 매질을 피해 옆집으로 도망 다니면서도 담배를 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혼을 원하지도 않았다. 이웃집 여자가 이렇게 말한다.
"남편이 그렇게 싫어하는 데, 담배를 끊는 건 어때요?"
담배 피우는 아내는 대답한다. "남편도 담배도 포기할 수 없어요." 남편도 담배도 포기할 수 없었던 아내는 담배 피우던 베란다에서 떨어져 죽는다.』
소설가 김형경의 '담배 피우는 여자'의 한 부분이다.
'남편도 담배도 포기할 수 없다.'는 여자의 말에는 '남편은 담배와 아내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지 않는데, 나는 어째서 강요받아야 하는가.'라는 항변이 숨어 있다. 나이 지긋한 남성 독자에게 '담배 피우는 여자'는 거북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여자'와 '담배'는 각각 '남자'와 남자에게 '금기된 다른 어떤 것'으로 바꿔 생각할 수 있다.
김형경의 소설 중에는 '관계'와 '심리'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아내와 남편, 아이와 부모, 동료와 동료, 연인과 연인…. 김형경은 20대 중반부터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에 관한 책을 수 백 권 읽었고, 삼십대 후반에는 100회 가량 정신분석을 받았다. 그 후 여행과 일상생활 속에서 긴 관찰과 자기분석 기간을 보냈다.
김형경이 최근 펴낸 '사람풍경' '천 개의 공감'은 소설이 아니라 본격적인 심리치유 에세이다. 실제 사례를 갖고 알기 쉽게 풀어내고 있는데 그 내공이 만만치 않다. 의사인 내 친구는 김형경의 에세이를 읽고, "처음부터 끝가지 사람 마음에 관한 이야기인데, 한 줄 한 줄이 예사롭지 않더라."고 말했다. 현직 의사 눈에 그렇게 보일 정도라면 김형경이 얼마나 치열하게 사람마음을 추적해왔는지 짐작할 만하다. 정신과 의사가 아닌 작가 신분임에도 김형경은 한겨레신문 지면을 통해 독자와 심리상담 코너를 진행하기도 했다.
김형경은 상대가 끊임없이 말하도록 만드는 묘한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기자란 사람들은 상대의 입을 열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어쩐 일인지 나는 김형경 앞에서 '내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 남편이 바람날까 두려운가요?
작가 김형경은 남성의 속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물론 오랜 관찰과 공부, 상담을 통해 얻은 결과물이다.
"(상담을 해보면) 95%의 아내들은 '세상 남자들이 모두 속물일지라도 자기 남편은 아닐 것'이라고 믿어요. 그런데 실제로는 5%만 아내가 생각하는 남편이고, 95%는 아내들이 '남의 남편 이야기'라고 믿는 경우에 해당하죠."
그러나 걱정할 것은 없다고 했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빼면, 남자들은 가정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요. 남성이 자기 영역을 지키려고 하는 습성은 여성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강해요. 가정을 지키겠다는 것은 기본이지요. 남편을 의심하는 아내들 중에는 병적으로 남편의 행적을 추적하는 경우도 있어요. 남편의 인터넷 서핑 목록을 살피고, 통화내역을 살피기도 하지요. 어리석고 잔인한 짓이에요."
김형경은 남편을 의심하는 아내들은 자신에 대해 자신감이 없거나 결혼을 '새로운 부모 구하기'로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혼생활의 가장 적절한 태도는 '혼자 살아도 되겠다.'는 능력과 자신감을 가진 상태라고 생각해요. 자기 삶에 대해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면 남편을 의심하느라 자신을 소모하지는 않을 겁니다."
김형경의 심리 에세이 '천 개의 공감'은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부부 사이에는 국경보다 무서운 경계가 존재한다. 아무리 부부라고 해도 각자의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영역이 존재한다. 그 공간을 침범하지 말라.'
책은 남편이든 아내든 상대의 일기를 훔쳐보고, 인터넷 서핑 흔적을 추적하고, 배우자가 모든 것을 자신과 나누기를 바라는 독점욕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불안감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형경은 남편(혹은 아내)을 관찰하는 시선을 거두고 자신을 계발할 때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다고 했다.
김형경은 남성들에게도 당부했다. 남성이 행복해지려면 여성에게 일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했다. 여성이 자기계발을 통해 자신만의 성취감을 맛본다면 남성을 덜 들볶는다는 것이다. 약하고 어여쁜 여성에 대해 남성이 환상을 가지는 한, 여성은 점점 약해지고, 그래서 남편밖에 모르는 의존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악순환이 남녀 모두를 괴롭히는 것은 자명하다.
◇ "소설을 대신 써주는 사람이 있다."
김형경은 1993년 첫 장편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로 국민일보 문학상을 받았다. 상금 1억 원. 당시 독자들은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기에 1억 원이냐'는 반응을 보였고, 문인 중에는 '우리나라처럼 작가가 먹고살기 힘든 환경에서 한 사람에게 1억 원의 상금을 수여하는 게 과연 옳으냐'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말하자면 '될 성싶은 나무 하나만 기르지 말고,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골고루 좀 나눠주자.'는 충언이었다.
화려한 경력 덕분에 김형경에게는 소문도 많았다. 그가 상금 1억원의 국민일보 문학상을 받았을 때는 '누가 대신 써줬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는 이 악의적인 소문에 '집에 우렁각시가 있는데, 그녀가 써 줬어요.'라고 답했다.
두 번째 소설이 인기를 얻을 무렵엔 '집에 숨겨놓은 아들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김형경은 독신이다. 세 번째 소설이 잘 팔리자, '일산에 커다란 저택이 있는데, 김형경이 책 써서 번 돈으로 지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김형경은 자신의 저택으로 불리는 집을 직접 구경한 적도 있다고 했다. 어마어마하게 좋은 집이었단다. 김형경은 현재 자기소유의 집이 없다. 집 한 채가 있기는 했는데, 심리 에세이를 쓰기 전, 집을 팔아 세계 여행비용으로 썼다.
"소문 때문에 무척 힘들어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 소문이 모두 사실이면 좋겠어요. 대신 글을 써 주는 사람이 있고, 아들이 있고, 책을 팔아 지은 커다란 저택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하."
사실 김형경은 작품값을 비싸게 치르는 작가다. 충분히 앓고, 충분히 공부한 다음 쓰는 것이다. 특히 그녀의 정신분석 에세이(△천 개의 공감 △사람풍경)는 세밀하고 집요한 공부와 분석을 토대로 씌어졌다.
그가 쓴 소설은 대부분 허구다. 워낙 '리얼'해서 독자들 중에는 그의 소설을 두고 김형경의 체험수기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있지만 소설 '세월'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밝혔다.
◇ "여성은 남성을 오해하고 있다"
"저랑 상담한 사람 중에 여성이 많았어요. 자연히 여성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많을 수밖에요. 그런데 제 책을 읽은 독자들 중에는 '너무 남성 입장에서 세상을 본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앞에 이야기한 남편과 아내에 관한 이야기도 그래요. 그런데 누구 입장이 아니라 사실이 그래요. 많은 여자들이 남자들을 오해하고 있어요. 물론 남성도 여성을 많이 오해하지만요."
작가 김형경이 글 쓰기와 심리치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릴 때부터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가 이혼했고, 그때부터 홀로 하숙생활을 했다. 너무나 불안하고 우울한 시절이었다. 세상과 부모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던 시절이었다. 그때부터 꼬박꼬박 일기를 썼는데, 일기 내용이 대부분 부모에 대한 욕이었다.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흉측하고 잔인한 욕들이었다.
"제 일기를 본 선생님은 나무라기는커녕 오히려 저를 지지해주고 상까지 주셨어요. 복도에 전시까지 했지요. 일기가 아니었다면 내부의 분노를 쏟아낼 길이 없어 비행을 저질렀을지도 몰라요. 그 후로도 일기를 꾸준히 썼고 대학 들어가서부터 일기가 습작으로 변하기 시작했어요."
김형경은 자신의 책 '천 개의 공감'에서 '자녀의 일기장에 부모님을 향한 욕이 가득 차 있더라도 나무라지 말라.'고 밝히고 있다. 일기장에 털어놓음으로써 아이들은 분노를 조절할 줄 알고,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학창시절 크고 작은 사고를 끊임없이 치던 학생이었다. 이상한 서클을 만들고, 선생님들의 금지를 무시하고 극장엘 들락거렸다. 밤에 불쑥 짐을 싸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김형경은 그럼에도 빗나가지 않았던 것은 일기 덕분이라고 했다.
"일기는 참 묘해요. 내일 또 사고를 칠지언정 일기를 쓰는 동안에는 반성하거든요. 사람은 반성을 통해 성장해요."
◇ 어디를 그렇게 싸돌아 다닐까
김형경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한 인간에 대해 '이런 사람이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다. 김형경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그녀의 집에 어떤 물건이 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그가 어떤 유형의 사람인가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김형경에게는 다양한 종류의 신발이 있다. 하얀 고무신은 절에 갈 때 갖고 간다. 가끔 절의 수련회에 참석하고 거기 머무는 내내 고무신을 신는다. 또 등산화가 있고, 야외용 러닝화, 실내 러닝머신용 러닝화가 있다. 라틴댄스를 배울 때 쓰는 라틴 슈즈도 있다. 물론 구두, 운동화 등 보통 사람들이 갖기 마련인 신발도 있다. 무슨 말인가? 김형경이 이 다양한 신발을 신고, 다양한 장소를 '싸돌아 다닌다(작가 김훈의 표현)'는 것이다.
그녀의 호기심 많은 성격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흡연자들은 흔히 한 종류의 담배를 피우기 십상이다. 그러나 김형경은 담배를 끊기 전, 여러 종류의 담배를 번갈아 피웠다. 은하수, 맨솔, 선 따위. 외국에 나가면 그 나라 담배를 종류별로 사서 피우곤 했단다. 그저 호기심으로.
책 종류도 다양하다. 소설가이니 만큼 문학서적은 그렇다 치고, 정신분석, 철학, 역사, 풍수지리, 명리학과 관련한 책들도 무수히 많다. 이 모든 게 대충 훑어보는 수준이 아니다. 김형경은 정신분석과 명리학에 있어서 전문가로 통한다. 한번 물면 놓지 않는 습성, 집요하게 파고드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음악도 좋아한다. 20, 30년대 뽕짝에서부터 최첨단 음악까지. 클래식도 좋고 블루스도 좋다. 무(巫)에 관해서도 관심이 많다. 또 창(唱)을 무척 좋아한다. 말하자면 그는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독신 여자에게는 남자가 얼쩡거리기 마련이다. 게다가 김형경은 단아하고, 품위 있고, 웃는 모습이 아이처럼 천진난만하다.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말하자면 인간이 좀처럼 갖기 힘든 장점도 갖고 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그에게는 로맨스가 없다. 김형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분석했다.
"세상에 할 일이 얼마나 많아요? 삶이 지루하거나 외로울 틈이 없어요."
이유는 또 있다. 작가라면 으레 술을 잘 마실 것 같지만, 김형경은 술을 별로 마시지 않는다. 그러니 술 마시고 마음이 흐트러질 틈이 없다. 게다가 늦어도 밤 11시, 12시면 집에 들어간다. 그는 너무 일찍 집에 들어가니 로맨스가 이루어질 틈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김형경은 국문학과 출신이다. 후배들 중에는 작가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시를 쓰겠다는 사람이 많다. 김형경은 작가가 되고싶어하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묻곤 한다.
"집에 돈이 많니?" 전업작가 생활이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는 말이다.
☆ 김형경은…
1960년 강원도 강릉 출생.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중앙일보 출판국 기자. 마스터라이프 편집장. 문예중앙(詩)'문학사상(중편소설) 당선. 국민일보 문학상(장편소설). ▲ 심리 에세이 '천 개의 공감' '사람풍경'. ▲ 소설-피리새는 피리가 없다. 외출. 성에.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세월. 담배 피우는 여자. 단종은 키가 작다. 등.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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