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겨울 들판이 나무들을 되돌려 주네

사계절 두루 이 세상 풍경을 가장 아름답게 완성하는 것은 나무입니다. 그러나 겨울나무만큼 나무의 본질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것이 또 있을까요. 오랜 만에 나무들을 보고 싶어 팔공산 순환도로를 달려 보았습니다. 사실 길이 아름다운 것은 나무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린나무들이나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이나 시절이 수상해도 말 한마디 없이 직립으로 견디어 온 그들을 저는 제 나름의 언어로 읽습니다.

겨울 들판은 정말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텅 비어 있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여백이 많아진 것이지요. 그 여백에 적절히 나무가 배치해 있었습니다. 수식이었던 잎과 색을 다 버리고 비로소 무채색 등뼈를 곧추 세운 존재들이 있었습니다. 균형 잡힌 수형을 자랑하는 느티나무를 시작으로 단풍나무·은행나무·이팝나무·벚나무·산딸나무 등을 차례로 만나면서 몇 차례 차를 세우다보면 그 나무들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오전 11시, 빈 나뭇가지에 햇살이 내릴 때 일제히 한 방향을 향해 햇빛을 빨아들이는 가지의 차가운 윤기를 보셨나요. 그 수유의 시간에 뿌리까지 팽팽하게 긴장하는 발돋움을 보셨나요. 자잘한 손가락 끝까지 최선을 다해 동참하는 성실을 보셨나요. 겨울나무들이 추위를 견디는 힘은 생명에 대한 아름다운 집중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무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인간에게 되돌려 주고 있지요. 과일의 빛과 향은 물론 열매나 뿌리의 약재며 그늘과 공기 그리고 풍경까지 말입니다. 대구는 녹지조성이 잘 된 도시여서 나무의 혜택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수종에 따라 특색 있는 가로를 꾸민 덕분에 벚꽃나무 길·은행나무 길·이팝나무 길·버짐나무 길이 생겨 지나다니는 시간이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 가로가 좀 길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좀 즐기려하면 끝나버리는 그 점이 안타까웠지요. 명물이 되려면 볼륨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키아로스타미의 어떤 영화에는 죽은 한 그루 나무에 날마다 물을 주는 소년이 있습니다. 그 이미지는 매우 강렬하여 종종 머리 속에 떠오르곤 하는데요. 그 소년은 죽은 나무지만 3년 동안 물을 주면 살아난다고 믿지요. 바로 그런 것입니다.

어떤 존재에 대하여 믿음으로 의탁하는 것, 저는 나무에 대해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겨울은 그 믿음이 더 강해지는 때이지요. 죽은 나무에 물을 주고 싶은 그런 시기이지요. 이 겨울, 텅 비어서 자꾸 외로워지는 그런 겨울, 죽은 나무에 물 한 번 주어 볼까요.

이규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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