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 잡학을 위한 변명

'잡학'은 '학'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긴 하지만 백만 년을 공부해도 학위를 주지 않는다. 권위가 생겨서 무슨 덕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기질적으로, 스스로 좋아서 '잡학'을 신봉해 온 사람으로서 연말 연시 친구들과 대화를 하는데 전에 없이 수세에 몰리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무슨 말만 꺼내면 "인터넷서 찾아보면 금방 알 일을 가지고 또 우긴다"는 식으로 타박을 하는 게 한두 사람이 아니다. 상당한 근거가 있는 이야기조차 인터넷이 없던 시절 내가 늘어놓았던 잡다한 이야기의 사례를 들어 신뢰에 금이 가게 하는 언동을 서슴치 않는 간 큰 인간들이 꽤 생겼다.

이를테면 '서울 청량리역에서 강원도 춘천을 오가던 총알택시가 한때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는데 그 총알택시를 몰던 사람들이 전원 사고가 나서 더 이상 택시 운전을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총알택시가 사라졌다'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그 이야기를 그대로 옮긴 것을 두고 나의 '백퍼센트 창작'이라고 결론지은 경우다.

그때는 내가 소설을 쓰기도 전인 십수년 전이고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이 도로사정이 열악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하며 그 총알택시와 아무런 연고가 없다는 것을 누누이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뻥'이니 '노가리'니 하는 비방을 그칠 줄 모르는 것이다. 그들에게 이런 편견을 가지게 한 원흉은 바로 인터넷, 그 중에서도 '지식 검색'이라고 이름 붙은 컨텐츠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과연 인터넷에서 손쉽게 검색·추출할 수 있는 '지식'이 제대로 된 지식인지, 그에 따르는 폐해는 없는지는 일단 논외로 하자. 술자리에서 이야깃거리로 등장할 수 있는 어떤 사안에 대해 언제나 딱 맞는 정답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사안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다.

어떤 사람은 '청량리역 총알택시의 부존재' 같은 하나의 사안에 대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정 짓는다. 어떤 사람은 '그런 쓸데없는 일을 말하는 것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 시간 낭비다'라는 식이다. 또 어떤 사안이 있으면 그에 대해 맞든 틀리든 간에 꼭 대답을 해야 하는 강박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대개 이런 지적은 여성들이 남성에 대해 하는 경우가 많다. "왜 어떤 남자들은 맞지도 않을 대답을 하느라 그렇게 애를 쓰는지 이해할 수 없다. 틀리고 나서도 반성할 줄 모르고 같은 경우를 되풀이한다"는 말이 그 예다. 그건 잡학을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어쩔 수 없는 기질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에게 돌아온 잔은 그냥 돌려보내지 못하는 법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인터넷 덕분에 몰라도 되는, 몰라도 잘 살았던 정보와 뉴스가 범람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범람하고 있는 까닭에 떠내려가는 수천 수만의 사실 가운데서 몇 개가 눈에 띄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가공과 선택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가령 '많다'는 '엄청나게 많다'가 되고, '엄청나게 많다'는 '무지막지하게 많은' 것에 의해 밀려나는 식이다. 정보와 뉴스의 전달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따금 TV 뉴스를 보도하는 기자의 높은 목청과 복장, 표정에서 나는 연극배우와 다큐멘터리 나레이터, 메가폰을 잡은 감독을 겸한 장르를 뛰어넘는, 다중적인 면모를 본다.

그러므로 '뉴스가 뉴스다워야 뉴스다'는 명제는 개그 프로그램의 희화적 선언으로 외쳐질 뿐, 오늘날의 뉴스는 점점 자극적인, 심지어 중독성을 가지게끔 변해 가고 있다. 뉴스가 리얼리티 쇼처럼 즐길 거리가 된 것이고 드라마와 시청률 경쟁을 벌인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경쟁상대가 생긴 셈이다.

다행히 세상 만사가 모두 뉴스거리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진실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악의나 개인적 손득과 상관없는 이야기, 잡학은 상상하는 즐거움을 줄 뿐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 개개의 벽돌 같은 사상(事象)을 모르타르처럼 연결시켜줌으로써 새로운 존재양태를 만들어낸다. 당연히 사는 게 즐거워지고 우리 인간 존재는 신비로워지며 삶의 가치가 올라간다.

치열한 키 크기 경쟁을 통해 햇빛을 독과점하려는 활엽수 숲, 그 아래쪽에 무성히 자라나는 풀과 관목과 그 아래 부엽토 속 박테리아에 우리 삶에 윤기를 가져다 주는 것이 훨씬 많다고 나는 믿는다. 키만 삐죽 클 뿐인 나무들 꼭대기 한참 위에 앉아 있는 별들의 속삭임에도 물론.

성석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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