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와 함께-이경록 作 '눈'

이경록

저 흰 북극의 곰들

머릴 휘두르고, 일어서고

대낮의 거리에서 껄껄거리는,

저 흰 북극의 곰들

통행을 무시하고 표지판을 무시하고

말과 수사법을 무시하고

라디오와, 한 잔의 커피와, 시민들의

끝내 모호한 신문, 텔레비전을 무시하고,

저 흰 북극의 곰들

머릴 휘두르고, 일어서고

대낮의 거리에서 껄껄거리는

저 흰 북극의 곰들

눈이, 흰 눈이, 펄펄 날리는 흰 눈이 "저 흰 북극의 곰"이 뜯어 뿌리는 털이었구나. 이 얼마나 놀라운 발견인가. 그렇다면 소복소복 내리는 눈은 북극곰이 잠든 모습이고, 휙휙 얼굴을 때리며 내리는 눈은 '껄껄거리'며 돌아다니는 곰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래, 도대체 얼마나 덩치가 컸으면 '대낮의 거리'를 덮을 정도인가. 덩치 큰 곰이 돌아다니는 동안에는 거리의 무법자인 자동차도 기가 죽어 엉금엉금 기어다닌다. 어디 자동차뿐인가. 헌법을 짓밟고, 언론을 탄압하고, 지식인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백색의 계엄령'. 그 유명한 최승호의 시 '대설주의보'보다 앞선, 강설(降雪)에서 계엄령을 읽어낸 놀라운 상상력. 제대로 꽃 피우기도 전에 지고 말았구나, 아까운 만29세.

장옥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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