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푸른 대구 이야기] 광나무

광나무는 가시나무, 후박나무, 호랑가시나무 등과 같이 원래는 난대지방에서 자라는 나무이나 대구에서도 잘 자라는 상록 활엽수이다. 따라서 이들이 있어 겨울 대구의 풍경을 보다 윤택하게 해준다. 20여 년 전 푸른 대구 가꾸기에 초석을 놓으신 이상희 시장 시절 많이 심었다. 지금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난대림을 연구하고 있는 학자들로서는 의외(意外)라는 입장이다.

대구수목원은 본밭은 물론 비탈면도 쓰레기가 묻힌 곳이다. 특히 북쪽 입구 쪽의 언덕처럼 생긴 비탈면은 한삼덩굴 등 풀만 자라 겨울이 되면 너무 삭막해 보였다. 뿐만 아니라 흙을 약간 덮어 두었기 때문에 장마 때 유실되거나 붕괴될 우려마저 있었다.

◇ 풀밖에 없는 비탈면 삭막'위험

나는 토사유출로 인한 비탈면의 붕괴도 막고 겨울에도 푸르게 할 방안으로 광나무를 심었다.

수목원 조성에 매달리다가 시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가끔 수목원을 들렀으나, 워낙 바빴던 관계로 사무실 일만 보고 돌아올 때가 많았다. 따라서 휴일 등 여유가 있을 때 찾으면 내 숨소리까지도 기억하던 영리한 개 들순이(수목원 조성 당시 현장에서 주어서 기른 들개)와 또 다른 개 해피와 같이 찬찬히 한바퀴 돌아보면서 어느 한 구석 내 발자국이 남아 있지 않는 곳이 없는 수목원을 살펴보는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가뭄으로 그랬는지 애써 심었던 왕대며 광나무, 조릿대의 생육상황이 형편없어 실망이 컸다. 그 후 3년여가 지난 어느 겨울 역시 이들과 함께 비탈면을 돌아보았더니 아 글쎄 80%정도가 살아남아 한겨울에도 푸른빛을 발산하고 있지 않는가.

내심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광나무에 대한 또 하나 잊지 못할 추억은 나무심기 광고였다.

1996년 봄, 민선 시정부가 시민 참여를 유도하고 '푸른 대구 가꾸기 사업'에 대한 시정부의 의지를 널리 알리려는 차원에서 역내(域內) 각 일간지의 맨 앞면에 이른바 '통광고'를 내기로 했다.

그러나 광고비가 만만치 않게 드는데 비해 예산은 한 푼도 확보되지 아니하였고 또한 광고 문안도 구체화해 놓지 않았다.

나는 상사에게 보고를 하고 당시 호황이던 대구지역 유력 건설회사인 청구, 우방, 보성, 화성 등 4개 회사(會社)로 하여금 광고비를 협찬하도록 실무자들과 협의하는 데 성공하였다.

◇ 비용 아끼려 가족출연 광고

광고기획사 직원을 불러 시안을 짜도록 했다.

당시 잘 나가던(?) 기업이라 하더라도 광고비가 만만하지 않아 전결권이 없는 각 사(社)의 홍보 담당자를 설득하는 데 여간 힘들지 않았다.

뿐만 이니라, 당시 대구에서 발간되는 일간지는 모두 4개였다. 따라서 어느 신문에는 내고 어느 신문에는 안 낼 수 없었다. 반면에 판매 부수가 다르고 따라서 광고효과도 다를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비용은 동일하게 요구하여 조정하는 데 애를 먹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내용이 정해지고 협찬사가 부담해야 할 금액이 결정되었으나, 이번에는 출연할 모델을 구할 돈이 없었다.

고심 끝에 같은 과에서 서무 일을 보던 김학인(현 환경관리공단)님에게 부탁하여 본인은 물론 아내, 딸 등 한 가족이 출연하도록 하고 양묘사업소(대구수목원의 전신)에서 광나무 심는 장면을 연출해서 촬영을 마쳤다.

나의 무모한 용기(?)로 결국 해내긴 했지만 일개 사무관의 지원 요청에 거금을 선뜻 지원해 준 협찬 사 관계자, 돈 한 푼 안 받고 전 가족이 출연해 준 김학인 님의 고마움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작게는 수목원의 비탈면을 푸르게 하는 데, 크게는 푸른 대구 가꾸기 사업의 첫 광고모델로 등장해 녹색도시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한 광나무. 열매는 여정실(女貞實)이라 하여 강정작용에 쓰이는 좋은 나무로 기억된다.

글·사진 이정웅(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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