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 마르요. 물 좀 주소···.'
풀어 헝클어진 머리, 바짝 마른 입술, 먼지 풀썩이는 사막 위에서 그 남자는 대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굵은 남저음 목청으로 목마름을 노래했다. '한국 모던 록의 창시자' 한대수(59). 통기타를 후려치며 목구멍 깊숙이 시대를 변주했던 20대의 그 사나이는 이제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인터뷰를 요청하자 "그는 이거 완전히 나를 위한 시리즈네!"라고 반겼다. 그만큼 그는 '상처의 화신'이다. 추운 겨울날. 서울 신촌의 한 오피스텔을 찾았다. 신발 하나 벗어놓기 민망한 7평짜리 공간. 그가 임신 5개월의 아내 옥산나와 함께 거처하는 곳이다.
큼직한 기타 케이스와 카메라, '문명의 방랑자'처럼 떠다니며 모은 기념품이 그 좁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호치민과 징기즈칸의 초상 아래에서 그를 만났다. "나의 상처는 빈터"라고 입을 뗐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라진 '빈터'의 고독이다.
그는 부산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한영교)는 신학자로 백낙준 박사와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했고, 미군정 때 경남도지사를 지냈다. 대구 경북고와 서울대 공대를 나온 아버지(한창석)는 그가 태어나자마자 우리나라에 핵물리학자가 필요하다는 할아버지의 권유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가 7세 때 홀연 실종된다. 훗날 아버지가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린 에드워드 텔러 박사의 수제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핵 제조 기술을 한국으로 가져가지 못하도록 CIA가 제거했다는 설도 있었다. 20대의 어머니(박정자)마저 새 인생을 찾아 떠나면서 그는 졸지에 고아가 됐다. 10대에 이미 한의 정서를 노래할 수 있었던 한대수의 슬픈 가족사다.
"'엄마'라고 부를 사람도 없었고, 같이 놀아 줄 친구도 없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독히 외로웠다는 기억뿐이었다." 외로운 소년이 아버지를 만난 것은 17세 때. FBI가 마침내 아버지를 찾은 것이다. 미국으로 건너가 처음 아버지를 대면했다. 그러나 한국어를 완전히 잊어버린 아버지가 던진 첫 말. "You're a big boy already. Do you smoke?"(벌써 많이 컸네. 담배 피울 줄 알아?) 그리고 부자는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그것이 아버지와 아들로서 제일 처음 함께 한 일이었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아버지와의 첫 대면은 기가 막히게 낯설어 슬프기까지 하다. 그 길로 그는 기타를 잡았다. 그리고 노래를 쓰기 시작했다. '행복의 나라'도 그때 쓴 것이다.
'장막을 걷어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더 보자...울고 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줘.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 가벼운 풀밭 길을 걸으며, 비와 천둥소리도 이겨내고 행복하고 싶다는 절규가 절절한 가사다.
그는 "고통이 너무 커 표현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모든 예술의 아티스트들도 그랬을 것."이라고 했다. 음악은 그에게 영혼의 안식처이자 도피처이다. "곡을 쓰면 뱀이 껍질을 벗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마치 주술사가 귀신을 쫓는 것과 같은, "엑소사이즈(exorcise)한 느낌이다."고 덧붙였다.
예술가의 상처는 예술로 치유된다. 그는 "나의 상처가 대중의 상처와 만나, 공명할 때 치유를 받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공명은 감동이고 눈물이다. 그는 "눈물은 정신적 섹스에서 나오는 것."이라며 웃었다. 그러나 '멀고 먼 길'·'고무신'·'행복의 나라' 등 그의 음악은 한때 불온한 음악으로 낙인 찍혔다. 심지어 '물 좀 주소'는 물고문을 묘사했다고 금지곡이 됐다.
당시 상처를 입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땐 나 혼자만 그런 것도 아니고 김민기·신중현도 다 당한 것 아니냐."며 "별로 상처가 안 됐다."고 했다. 그는 대중에게 포섭되지 않는 가수다. "나는 대중을 생각하지 않는다. 완벽하게 무시한다. 작품이 좋으냐 나쁘냐가 문제지, 대중이 좋아하느냐 안하느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모차르트·베토벤·바그너가 그렇듯, 비틀즈가 그렇듯, 그리고 김현식과 김광석이 그렇듯 "죽고 나서 음악이 산다."는 생각이다. "대중적인 스타가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다."며 "10년,20년 후 다시 되돌아오는 것이 대중."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포섭되지 않는 이단아'로 지금도 걷고 있다. 과거의 향수에만 집착하는 70,80 가수와 달리 그는 여전히 아들뻘 연주자를 이끌고 음반을 만든다. 1974년 첫 앨범 '멀고 먼 길'을 낸 후 지금까지 12개의 앨범을 발표했다. 특히 2002년 9집 '고민', 2004년 10집 '상처', 2006년 12집 '욕망'은 자신의 관념과 성찰을 잘 표현하고 있다.
베트남 공산혁명의 영웅 '호치민'에 대한 경외심도 담고, '조지 부시 같은 폭군은 안돼요. 김정일 선생 여기 앉아요. 우리 같이 소주 한 잔 합시다. 랄랄라~'('대통령')와 같은 해학적인 은유도 담았다. 그럼에도 '고민'·'상처'·'욕망'과 같은 앨범이름에서 보듯 고통은 아직도 그를 옥죄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행복의 나라'를 꿈꾸었지만, 그는 "나는 행복하지 않다. 행복하다 생각했던 적도 한 번도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시를 쓰고, 사진을 찍고, 음악을 하면서도, 그리고 두 번의 결혼을 했지만 여전히 그는 자유와 사랑에 목말라 하며 사막 같은 이 시대를 살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고 기자와 가수는 부둥켜안았다. 상처없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 대구로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다시 한대수를 떠올렸다. 그는 정녕 바다를 도모하면서도 정작 바다를 등지고 서 있는 이스터섬의 거대한 모아이 석상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1948년 부산에서 출생. 1966년 미국 뉴 햄프셔 대학에서 수의학 전공. 1967년 뉴욕 Institute of Photography에서 사진 전공. 1968년 한국에서 포크 싱어송라이터로 데뷔. 1970년 대한민국 국전 사진부문 수상. 1974년 1집 '멀고 먼 길' 발표, 코리아 헤럴드 기자. 1977년 뉴욕서 록밴드 징기즈칸 결성. 1992년 사진집 '맨하탄 빛의 광장' 출간. 1997년 일본 후쿠오카서 카르멘 마키와 조인트 공연, 시집 '대지의 새벽' 출간. 1998년 자서전 출간. 2006년 12집 '욕망'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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