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다시 보는 국채보상운동 100년] ②여성들 참여로 열기 고조

1907년 2월 21일 대구군민운동으로 촉발된 국채보상운동은 여성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활활 타오르게 됐다. 여성들이 가장 먼저 참여한 곳도 역시 대구였다. 서울에서 국채보상기성회가 조직된 다음날인 2월 23일 대구 남일동에서 달성 서씨 명문 출신인 서병규의 처 등 일곱 부인들은'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를 결성하고 반지·팔지·목걸이 등 패물을 의연금으로 내놓았다.

이들은 순 한글로 된 '경고 아 부인 동포라'란 격문에서 "우리가 여자 몸으로 삼종지의외에 간섭할 일이 없사오나 나라를 위하는 마음과 백성된 도리에야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 듣건대 국채를 갚으려고 2천만 동포들이 석달간 연초를 아니 피우고 대전을 구취한다 하오니 족히 사람으로 흥감케 할지요 진정으로 아름다움이라. 그러하오나 부인을 무론한다니 대저 여자는 백성이 아니며 화육중 일물이 아니리요"라고 자신들의 사회적인 존재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이 격문은 여성들의 국채보상운동 참여를 유도하는 '기폭제'가 됐고 전국 각지에서 국채보상부인회가 탄생했다.

서울의 김일당, 김석자, 박회당 등은 2월 28일 식생활을 절약하여 국채보상금을 내자는 취지로 '부인감찬회'를 결성했다. 서울의 양반집 부인들도 3월 초 '대안동국채보상부인회'를 결성했다. 이런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지방 여성들도 국채보상 모금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부산에서는 '부산항 좌천리 부인회', '감선의연회' 등이 대대적인 활동을 펼쳤다. 3월 14일 삼화항(현재 진남포)에서 결성된'삼화항 패물폐지부인회'도 의연금 모집에 앞장섰다.

인천에서는 3월 29일 인천 지역의 기독교 부인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국미적성회'의 활동이 빛났다. 당시 주요 발기인은 박우리바·여누이사·정혜스터·장마리아 ·송전심 등이었다. '국미적성회'는 초기 회원만도 80여 명에 달하는 등 부인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호응 을 받았다. 이 중 선발된 권고위원 20명은 2명씩 1개 조로 편성돼 각각 구역을 맡았다.'국미적성회'는 활동을 개시한 지 1개월 만에 회원수가 500여 명으로 늘어날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

대구 기생 앵무는 당시 큰 돈인 100원을 의연금으로 내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앵무는 "금번 국채보상은 국민 의무이거늘 여자로서 감히 남자보다 일분이라도 더 낼 수 없으니 누구든지 기천원을 출연하면 나도 그만큼 출연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각지 기생들의 집단적인 의연금 동참으로 이어졌다.

김교성기자 kg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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