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제칼럼] '줄탁동시'

올해는 대구은행이 창립 40주년을 맞는 해다. 기업 평균 수명이 15년에 불과한 오늘날, 마흔 살의 나이테를 기록하게 된 것은 자랑일수도 있지만, 어느 면에서는 그만큼 기대여명이 짧다는 뜻에서 두려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대구은행을 100년 이상 지속될 '세계적인 초우량 지역은행'으로 만들 수 없을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그래서 "혼자서 꾸는 꿈은 한낫 꿈에 불과하지만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믿음으로 이 꿈을 우리 임직원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새해 화두를 '줄탁동시'로 정했다.

줄탁동시는 본래 중국의 민간에서 쓰이던 말, 송나라 때 임제종의 화두집인 '벽암록(碧巖錄)'에 인용되면서 불가의 중요한 화두가 되었으며, 흔히 줄여서 '줄탁'이라고도 한다.

병아리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 알 속에서 쪼는 것을 줄이라 하고, 어미 닭이 그 소리를 듣고 밖에서 쪼아주는 것을 탁(啄)이라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행위가 동시에 일어나야 온전한 병아리로 태어날 수 있다.

만약 어미닭과 알 속의 병아리가 서로 쪼는 곳과 시기가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지 못한다. 이처럼 어떤 일이 동시에 일어나야 일이 완성되는 것을 줄탁동시라 한다.

선가(禪家)에서는 줄탁동시를 스승이 제자를 지도하여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것에 비유하고 있지만, 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폭넓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가정의 행복은 부부가 줄탁동시할 때 실현되고, 세계적인 기업은 노사가 줄탁동시해야 비로소 탄생할 수 있다. 그리고 경쟁력 있고 풍요로운 지역공동체는 지역의 지도자와 시민이 줄탁동시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줄탁동시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첫째, 내가 먼저 변해야 한다. 기업이라면 가치 있는 상품과 서비스를 먼저 제공해야 시장과 고객이 비로소 반응하고 감동한다.

둘째, 경청이다. 어미닭이 알 속의 병아리가 부화할 준비가 되었는지, 또 어느 부위를 쪼아야 할지를 알기 위해서는 잘 들어야 하듯이, 항상 고객의 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

셋째, 타이밍이다. 아무리 좋은 상품과 서비스라도 고객이 필요로 할 때 제공해야만 비로소 시장과 고객의 열광과 감동의 화답을 받을 수 있다.

글로벌 경쟁과 지식정보화 사회를 맞아, 무기력과 보수성의 낡은 껍질을 깨고 경쟁력 있고 풍요로운 도시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우리 대구에게 지금 요구되는 것이 바로 '줄탁동시'가 아닌가 싶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대구는 미래에 대한 비전과 희망을 상실한 채 대안 없는 비판만을 제기하거나 무력감에 젖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성장성과 부가가치가 낮은 경공업과 서비스산업이 대부분을 이룸으로써 지역총생산(GRDP)이 타 시·도에 비해 여전히 열세에 있고, 인구가 줄어드는 등 대구의 성장잠재력이 날로 약화되고 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대구 경제가 지닌 강점도 적지 않다. 대구는 대규모 공장이 적어 1인당 지역총생산은 16개 시, 도 중에서 늘 꼴찌지만 1인당 세금이나 소비 수준은 단연 상위권을 달리고 있고, 인근 7개 시, 군을 포함한 메트로폴리탄 생활권의 인구가 350만에 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520만 명의 인구를 가진 대구, 경북 광역경제권의 중추도시이자 교육, 소비,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과거 산업사회의 시각에서 보면 대구는 대기업 공장이 없고 생산의 활력이 떨어진 낙후된 도시로 비쳐질 수 있다.

하지만 문화와 브랜드가 지역의 경쟁력을 좌우하고 신기술간의 융합과 정보화가 빠르게 진전되는 새로운 산업환경 하에서는 대구의 성장잠재력이 타 지역 못지않게 크다고 할 수 있다.

섬유, 메카트로닉스, 전통생물, 모바일, 나노 등 기존의 지역 전략산업 육성을 통해 산업구조를 일신하는 동시에, 대도시권에 적합한 문화관광, 보건의료, 금융, 비즈니스서비스 등 고부가가치의 도시형 산업을 육성한다면 일자리를 늘리고 경제의 활력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쾌적하고 환경친화적인 도시 공간이 마련되고 문화와 예술의 향기가 살아 숨쉬는 '인간의 얼굴을 한 도시', '살고 싶은 도시'로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다.

경제통합의 정신을 더욱 살려 대구와 경북이 서로 줄탁동시하고, 지역의 지도자들과 시민이 줄탁동시하며, 노사가 줄탁동시하여 한 건의 분규도 없는 산업평화를 이룩할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새해엔 지역의 모든 경제 주체들이 보다 풍요롭고 경쟁력 있는 지역을 만들기 위해 줄탁동시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해본다.

이화언 대구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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