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목요 시조산책-이호우 作 '회상'

회상

이호우

몹시 추운 밤이었다

나는 커피만 거듭하고

너는 말없이 자꾸

성냥개비를 꺾기만 했다

그것이 서로의 인생의

갈림길이었구나

선입견은 좀과 같습니다. 온전한 평가에 붉은 상처의 길을 냅니다. 그런 선입견은 시인한테도 작용합니다. 강렬한 몇 편의 시가 한 시인의 전모를 규정해 버리는 거죠. 이호우만 해도 '바람벌' '깃발' '휴화산' 같은 사회성 짙은 일련의 작품이 다른 작품의 앞을 가려 버리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이미 눈치들을 채셨겠지만, 이호우의 시세계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습니다. 순수와 참여를 가리지 않고, 인간과 자연과 사회에 두루 시선이 미칩니다. 마치 다면경 같다고나 할까요. 특정 경향에 갇히지 않는 그의 의식은 시대 앞에 늘 깨어 있었습니다.

'회상'은 인간적인 면모가 두드러진 작품입니다. 말은 차마 못한 채 한쪽은 커피만 거듭하고, 다른 한쪽은 연신 성냥개비를 꺾고 있군요. '커피'와 '성냥개비'가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마음의 기류를 읽게 합니다. 바람에 창문이 덜컹거리는 몹시도 추운 밤…. 어긋난 인연의 갈피에는 이미 숱한 바람과 햇볕이 머물다 갔습니다. 그런데, 다 지난 일로만 여긴 그것이 겨울 흙담 밑 잔양처럼 오래 남아 부시다니요?

박기섭(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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