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의 황제 중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治世(치세)를 동시대 로마인들은 '새쿠룸 아우레움(Saeculum Aureum'황금시대)'이라고 불렀다. '五賢帝(오현제)시대'라고 부른 서기 96년부터 180년까지 로마 제국을 최전성기로 이끈 이들 세 인물로 인해 '로마는 진정으로 행복한 시대'였다는 타키투스의 말을 빌려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썼다.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가 꼽은 지도자에게 필요한 세 가지 조건 즉 '역량'과 '행운''시대적 필요성'을 충족시켰다는게 이들이 賢帝(현제)로 불린 이유다. 시대를 이끄는 진정한 리더십을 갖춘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역량과 행운을 갖추었으되 시대의 요청에 부응할 수 있는 재능이 부족하면 좋은 지도자가 아니라는 마키아벨리의 생각은 '리더십'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또 다른 추동력을 요구했다. 변혁은 항상 혼돈을 수반한다. 그 혼돈이 가라앉고 새 길이 열리면 융성기가 상당 기간 지속되는 것이 역사의 공식이다. 고구려와 漢(한)'唐(당), 몽골과 티무르, 淸(청)이 그러했고, 트라야누스 시대의 로마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 같은 공식이 저절로 성립된 것은 아니다. 조건이 필요했다. 새로운 인물이 출현하고 새로운 이념에 기반한 발전된 사고로 결속된 구성원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창조해내고 그 집단적 역량을 유지해내는 조건이다. 결국 역사의 발전은 시대를 정확하게 보고 움직이는 힘이 보편화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발전이 한 사람의 힘으로 이뤄진 것이라면 진정 행복한 시대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올해 100주년을 맞은 國債報償運動(국채보상운동)도 혼돈을 극복하려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새 길은 4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후에 결실로 맺어졌지만 말이다. '斷煙(단연)으로 돈을 모아 나라 빚을 갚자'며 대구군민운동으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대한제국이 진 빚 1천300만 원을 갚아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뜻에서 民(민)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운동이다. 현제와 리더십 부재의 시대에 사회구성원들은 합심해 새로운 길을 열어보려고 몸부림쳤다. 이 운동의 화두는 '국가'였다. 외세에 짓밟힌 나라를 되찾기 위해 결국 백성이 최후의 보루로 나선 것이다. '애국심이여 애국심이여 대구 서공 상돈일세'라는 국채보상가 노랫말처럼 愛國(애국)은 시대성이었다.
개인화와 민주화 시대에 시대성을 짚어내기란 쉽지 않다. 석학제현들이 해석하고 사회구성원들이 수긍해야할 부분이지만 결코 용이치 않다. 공동체 역량의 잣대인 정치'경제'군사'외교 각 부분에서 누수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도 低迷(저미)한 시대성과 무관치는 않을 것이다. 지난 반세기동안 그나마 우리 사회를 떠받쳐온 韓國民(한국민)이라는 정체성도 혼란스럽다. 이는 세계화라는 外延(외연)이 확장되면서 잉태된 결과만은 아니다. 21세기에도 국가는 많은 사회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이념과 생존 방식의 軸(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권,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다. '국가'라는 하드웨어와 '사상'이라는 소프트웨어는 시대성을 낳는 그릇이자 토양이기 때문이다. 현대처럼 국가간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21세기의 시대성과 생존방식을 국가와 결부시키는 것마저도 조심스러운 현실이다.
시대성과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정립이 전제되지 않으면 발전보다 정체가 우위에 선다는 것을 동서고금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하루하루 먹고 사는데 급급하다는 것은 시대성을 의식하지 않거나 절실하지 않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대성을 외면하기에는 우리 주변의 환경이 너무나 위태롭다. 역사적 시대착오의 늪에 빠져 허덕이는 한국사회를 보면서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이 든다. 프랑스 역사학자 르네 그루세의 "지적이며 적극적이고 케케묵은 편견에서 자유로웠던 지도자들과 백성들만이 사회를 발전시켜 새롭게 역사를 써나간다"는 말이 설득력을 얻는 것도 그런 이유다. 진정 행복한 시대의 조건은 무엇인가.
서종철 논설위원 kyo425@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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