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윤조의 수다수다] 만화 전성시대

"만화책이 책이야?"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만화책은 마냥 시간을 죽이는 도구일 뿐, 인생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젠 만화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와인 입문서로 '신의 물방울'을 탐독하는 애호가들이 상당수인데다, 클래식을 전공하는 학생들의 풋풋한 사랑이야기를 그린 순정만화 '노다메 칸타빌레'를 읽고나면 웬만한 클래식에 대한 상식은 줄줄 꿸 수 있을 정도.

이쯤되면 어지간한 상식개론서 뺨치는 수준이다. 이런 만화들의 대부분은 일본 작가들의 작품. 현재 만화시장의 70% 가까이를 일본만화가 점유하고 있다. 우리 만화는 일간지 연재나, 웹카툰 등에서 강세를 얻고 있는 반면, 전통적인 일반 코믹스 단행본에서는 일본의 공세에 밀리고 있는 것이다.

# 영화 드라마, 만화를 수혈하다.

만화에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재미가 있다? 최근 대중문화계에는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드라마 제작 바람이 불고 있다. 올드보이가 국내외에서 극찬을 받은 것을 기점으로, 만화의 상상력을 공수하는 작업이 대대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

박찬욱 감독이 2003년 발표한 영화 '올드보이'는 일본 작가 미네기시 노부아키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해 제 57회(2004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거머줬다. 영화는 이유도 모른 채 10년이나 감금당했던 남자가 복수를 한다는 설정 자체를 원작에서 따오긴 했지만 캐릭터를 더욱 부각시키고 결말을 비틀어 원작을 탁월하게 재해석했다는 평가. 결국 올드보이는 일본 영화 평론가들이 뽑은 최고의 리메이크 영화로 선정됐으며, 원작의 나라인 일본은 물론이고, 브라질'스페인'핀란드 등과 수출계약을 맺었고, 미국에는 리메이크 판권 계약을 체결하는 성과를 올렸다.

2006년 하반기 최고의 흥행작으로 손꼽히는 영화 '미녀는 괴로워' 역시 일본 작가 스즈키 유미코의 동명 만화를 차용했다. 하지만 이 영화 역시 원작과는 다르다. 원작과 가장 큰 차이점은 미녀로 변신하기 전 주인공 한나(김아중)의 뚱뚱한 모습이 만화에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 김아중은 극중 사실감을 높이기 위해 약 4시간이 걸리는 특수분장으로 뚱보 변신을 소화했다. 이런 노력을 통해 외모지상주의를 조금 더 부각시키는 효과를 얻은 것이다.

만화를 원작으로 한 일본 영화의 공세도 상당했다. 학생들사이에서 놀이로까지 번졌던 '데쓰노트', 같은 이름을 쓰는 두 소녀의 성장기를 그린 '나나', 미술대학 학생들의 풋풋한 사랑과 성장스토리를 그린 '허니와 클로버' 등이 소개되면서 잔잔한 인기를 끌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소개되지 않은 일본드라마의 인기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다. 클래식을 전공하는 청춘남녀의 사랑을 그린 '노다메 칸타빌레'는 원작 만화를 바탕으로 일본에서 드라마화 해 큰 인기를 얻었다. 이것이 인터넷 카페 등을 통해 우리나라에 소개되면서 '일드'(일본드라마의 줄임말) 마니아 사이에서는 주인공이 들고 다니는 피아노 그림의 가방을 구하려는 여성들도 상당수.

강효정(29'여)씨는 "일본드라마를 좋아하는 남편 때문에 '노다메 칸타빌레'를 다운 받아 시청하다 마니아가 됐다."며 "얼마전 일본을 여행하는 친구에게 부탁해 우리돈으로 8만원에 달하는 가방도 하나 장만했다."고 했다. 또 케이블 채널 tvN에서 방송되고 있는 '쿠로사기'는 '검은사기'라는 제목으로 출간 돼 큰 인기를 얻었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사기꾼 때문에 가족을 잃은 주인공이 세상의 사기꾼들에게 도리어 사기를 치고 다닌다는 이색적인 소재를 담고 있다.

#원소스 멀티유스 시대, 만화가 이끈다

이렇듯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들이 속속 등장고 있는 것은 한국적인 소재와 전개에 식상한 관객들이 새롭고 톡톡튀는 상상력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 특히 일본에서는 '원소스 멀티유스' 시스템의 바탕이 되는 만화에 엄청난 투자를 통해, 한번 일본 문화에 매료된 소비자들이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게끔하는 그물망식 유인책을 통해 부가가치를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이에 대해 윤기헌 부산대 디자인학과 교수는 "우리도 최근에는 원작 콘텐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만화 산업 진흥에 많은 돈을 쏟아붓고 있지만 여전히 일본의 물량공세에 밀리고 있는 실정"이라며 "만화 산업의 육성을 위해 자유를 제약하고 있는 청소년 보호법이나, 저작권을 무시한 만화 대여점 체제 등에도 대대적인 정비가 필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고 일본의 원작을 가져와 리메이크만 한다고 해서 한탄할 일도 아니다. 제대로 된 재해석이 뒷받침 된다면 오히려 원작의 나라에 재수출하는 '역공'도 가능한 것. 드라마 '하얀거탑'의 경우 원작제작사인 후지TV에서 우선방영권을 요구할 정도로 관심을 끌고 있는 것.

문제는 자칫 우리의 제작 형태가 어려운 원작 생산보다 쉽게 성공을 예견할 수 있는 리메이크에 너무 집중되면서 제작 토대를 약화시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다.

#왜 일본만화에 열광하나?

일본만화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작품의 완성도가 높기 때문. 게다가 전통적으로 일본이 강세인 분야이기 때문에 그만큼 종사하는 인력도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 워낙 다양한 작품 들 속에서 '진주'를 캐 내기가 쉽다는 이유도 있다.

일본만화광을 자처하는 직장인 강주훈(34) 씨는 "일본만화는 워낙 소재가 다양하고 구성이 치밀한데다 스토리 전개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전개되는 매력이 있다."고 했다. 미스터 초밥왕, 몬스터, 베가본드 등 인기를 끄는 만화에는 우리 만화에는 흔히 등장하지 않는 이색적인 소재와 탄탄한 구성력이 바탕이 돼 있다는 말이다.

강 씨는 "'꼴찌 동경대가다'라는 만화의 경우 실제 동경대에 입학하는 학생들이 이 만화책을 보고 학습방법을 배웠다고 할 정도로 탄탄한 취재를 바탕으로 만든 만화"라며 "여름철만 되면 빠지지 않고 소개되는 이토준지의 공포만화 컬렉션은 단순히 귀신이 등장해 무서움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대단한 상상력을 경험할 수 있는 수작"이라고 극찬했다.

이런 지적에 대해 만화전문 출판사인 '학산문화사'에서는 "시스템의 차이가 작품 수준의 차이를 빚어낼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는 만화라고 하면 단행본으로 먼저 인식돼지만 일본에서는 잡지로 연재 된 후 단행본 화가 이뤄지는데다, 한 작품당 2~4명의 담당기자가 작가와 함께 작품을 만들어가면서 이야기의 자료를 수집하고 그 사이 올라오는 독자들의 의견도 반영하면서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어 낸다는 것.

최근 인기있는 일본 만화들을 대부분 수입'출판하고 있는 학산문화사에는 나름대로의 선별 노하우도 가지고 있다. 일단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10, 20대들에게 폭넓게 읽혀 질 수 있는 흥미위주의 작품. '강철의 연금술사'나, '나나', '배가본드' 등이 좋은 사례다. 하지만 최근에는 만화를 즐기는 계층이 폭넓어지면서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인들이 즐길 수 있는 만화로도 눈을 돌리고 있다. 학산문화사는 "'월희', '기생수'같은 작품은 마니아층을 염두에 두고 발간한 작품이고, '빛의 천사 프리큐어', '크레용 신짱' 등은 애니메이션으로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작품"이라며 "최근에는 '신의 물방울'의 선전으로 30, 40대 성인들을 공략한 만화책도 두루 선보일 예정"이라고 했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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