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아버지 방에 들어가서 노는 것이 좋았다. 니스를 잘 먹여 반질반질한 방바닥에 뒹굴며 아버지의 책장을 훑어보는 일은 정말 재미있었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유리문 달린 책장을 맞춰서 양쪽 벽을 책으로 빼곡히 메운 것은 아버지의 취향을 말하기도 한다.
당시엔 뜻을 알 수 없는 책들이지만 제목만 읽어 내려가도 좋았고, 비슷해 보이지만 각양각색인 그 책들은 눈을 즐겁게도 해 주었다. 그 때 유리문을 열고 책 한 권을 뽑아들면 오래된 책일수록 사람을 아득하게 하는 말할 수 없는 어떤 향기를 맡을 수 있었는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버지 방의 매혹은 그 냄새에 있었던 것 같다.
그건 이후 헌책방엘 들어서거나 책방 골목을 지나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냄새는 바랜 종이와 퇴색한 활자가 불러오는 고풍스러움에 기인하지만 그저 오래 묵은 종이에서 나는 것과는 달랐다. 얇은 종이와 종이사이에는 책 읽는 사람의 영혼이 스며드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 냄새는 고요한 영혼의 냄새가 아닐까.
그런데 언제부턴가 헌책과 헌책방이 하나 둘 사라져 지금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남산동 헌책방 골목도 그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책방들은 흔적도 없어졌다. 그 책들, 영혼이 스며들었음직한 그 책들은 어디로 간 걸까.
지난 9월 부산 보수동에서는 이색적인 축제가 있었다. 이름하여 '헌 책방골목 축제'이다. 보수동은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몰려들면서 형성된 낙후한 골목이다. 그러나 전국 유일의 헌책방 밀집지역이던 그 골목의 명맥을 살리기 위해 책방과 시민들이 나섰고 이어 축제로 끌어 올렸던 것이다. 충분히 의미있고 성공적이었다니 부러운 일이다.
여전히 꼬불꼬불하고 좁은 골목이지만 정성을 다해 다듬고 자존심을 다해 지킨 이들 덕분에 그 골목은 다시 살아나 곧 문화의 거리로 조성된다고 한다. 그때, 그 골목에 들어선 순간 거창한 현대화가 결코 표현할 수 없는 고적한 아우라를 느낄 수 있었다.
책방과 책방 사이, 책과 책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내가 본 것은 책만이 아니었다. 지나간 것, 오래된 것, 낡은 것이 우리를 얼마나 편안하고 따스하게 하는지. 그리고 누군가 나 이전에 이 책장을 넘겼으리라는 느낌은 짜릿하고도 흥분되는 일이었다. 혹 미지의 그 사람이 내가 꿈에도 그리워 한 한용운이나 윤동주가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누구든지 한 번쯤 그 골목에 가보시라. 가서 헌 책 향기와 함께 이제는 절판된 그리움들도 한 번쯤 더듬어 보시라.
이규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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