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살아가는 이야기)친구 위해 '연탄 서리'

스무 살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겨울 어느 날, 조야동에서 자취를 하는 친구 생일이라 자취집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때만 해도 조야동은 시내버스가 다닐 수 없는 잠수교가 유일한 교통통로라 미니버스를 이용해서 건너야 했습니다. 생일 축하를 하러 가는 길이라 잠수교를 걸어서 건너기로 하고 차비들을 모아 생일 선물로 쵸코파이 한 통을 샀습니다.

친구 집에 가서 맛있는 저녁이라도 먹겠다는 생각으로 추운 겨울날 잠수교를 건너서 들어선 방안엔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친구 녀석은 불덩이처럼 열이 펄펄 나는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습니다. 불을 피우려고 부엌으로 나갔더니 달랑 부뚜막 한쪽에 연탄 한 장이 거미줄을 뒤집어쓰고 있었습니다. 더 생각할 겨를 없이 착화탄 사다 불 피우고 나니 아픈 친구 녀석 재산을 다 써버린 것 같아 미안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집 연탄 몇 장을 위치이동하기로 모의하였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야동은 대문이 없는 집이 대부분이고 골목에 가로등도 없었던 터라 연탄 서리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신문지에 연탄 두 장씩 싸서 두어 번 나르고 나니 들킬까 두려워 추운 겨울 날씨에도 온몸에 땀이 배어 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두어 번 더 하고 나서 옷가지는 온통 연탄가루가 범벅이 되어 있어도 방안으로 전해져 오는 온기처럼 마음이 훈훈해지더군요. "친구야 이 연탄은 네 생일 선물이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연말 모임에서야 그 연탄이 그렇게 위치이동된 것임을 친구에게 고백하고 함께 웃었습니다. 세상살이가 어렵다 보니 빛 바랜 기억처럼 하얗게 변해버린 연탄재들이 다시 골목길을 점령하는 모습이 심심찮게 보이지만 이제는 치워야할 대상이 아니라 가난하고 힘든 시절을 기억하게 하는 매개체가 되기도 합니다. 연탄 한 장도 꽤나 소중했던 그때 80년대 초 연탄 두 장씩 잃어버린 조야동 주민들께 늦게나마 사죄 드리며, 그 온기로 지금은 건강한 육체와 정신으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이시호(대구시 동구 신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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