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정치란 인간 理性(이성)의 신뢰를 바탕으로 이뤄져야 한다. '하면 된다'고 밀어붙이는 비이성적 제도가 아니라 '할 수 있음에도 자제하면서 여백을 남기는 제도'여야 한다. 하지만 權力(권력)이 이성적인 자제력을 잃거나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법률과 제도에 금지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권한을 휘두를 때 害惡(해악)을 부르게 마련이다. 그런 사회는 '도덕적 무정부 상태'를 유발할 수도 있다.
◇赦免(사면)은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다. 그렇다고 자의적 행사까지 허용되지는 않는다. 통치권자의 恩典(은전)은 아니며, 대통령의 권한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면은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되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아 제한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능이라 할 수 있다. 사면권의 濫用(남용)에 대해 끊이지 않는 논란이 빚어져온 건 '국민적 용서'의 한계를 넘어선 경우가 많았던 탓이다.
◇정부는 어제 434명의 사면 대상자를 발표했다. 노무현 대통령 취임 4주년(25일)과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10년을 맞아 12일자로 이들이 특별사면'복권'감형된다. 경제인 160명, 정치인과 전 공직자 44명, 16대 大選(대선) 사범 223명, 대학 분규 사범 7명 등이 그들이다. 참여정부 들어 일곱 번째 단행된 이번 사면은 경제 回生(회생)과 국민 통합이 취지라지만 또 정치인과 선거사범들에게 무더기 혜택을 줬다.
◇'경제인 주 대상의 특사'를 강조해 왔으나 결과는 달랐다. 박지원 전 대통령비서실장,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 등 김대중 전 대통령 측근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어 'DJ와 민주당에의 미소 제스처'라는 비판이 나온다. 심지어 刑(형)이 확정된 지 몇 달밖에 안 되는 경우도 있다. 노 대통령 측근은 배제됐으나 8'15 특사 때 이미 대다수 사면되지 않았던가.
◇'사면권 남용'은 이제 입에 올리기조차 지겨울 정도다. 이번엔 '참여정부 4주년'IMF 10년 특사'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과연 수긍할 만한 수준이라 할 수 있을까. 정치적 利害打算(이해타산)과 아리송한 복선이 안 깔렸다고 느낄 사람들이 어느 정도나 될는지…. 사면권이 국가 이익과 국민 화합 차원에서 이뤄지지 않을 때 '자의적 지배' '폭력적 지배' 못잖게 해악적임은 자명한 사실이지 않은가.
이태수 논설주간 tspoet@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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