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

'도전과 응전'이란 개념으로 인류문명의 흥망성쇠를 해석해 낸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1972년 일본의 평화운동가 이케다 다이사쿠와의 대담에서 1, 2차세계대전 이후 영국이 급격하게 몰락의 길을 걷게 된 원인의 하나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통을 따른 귀족 자제들의 대규모 전사와 이로 인한 인적자원의 고갈을 꼽았다.

당시 영국 인재의 산실인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을 다니던 귀족 자제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자신들을 군대에서 빼줄 수 있는 재력과 가문의 배경이 있었지만 기꺼이 전장으로 달려갔고 제일선에서 돌격을 감행하다 죽어갔다.

이는 1차대전 당시 귀족 자제들로 채워져 있던 영국군 장교들의 사상률이 일반병사보다 훨씬 높게 나타나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 인한 인력의 공백은 2차대전 발발 직전 영국이 히틀러에게 평화를 구걸하며 유럽대륙에서 나치 독일군과의 결전을 회피하려 했던 원인의 하나라는 해석도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외교 사부(師父)로 일컬어지는 나카니시 데루마사 교토대 교수도 그의 저서 '대영제국 쇠망사'(까치)에서 비슷한 진단을 내린다. 여기서 그는 정확한 수치는 제시하지 않았지만 옥스퍼드·케임브리지대 재학생 중 절반 이상이 1차대전에서 전사했으며 이는 이후 영국의 국가경영에 큰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영국 귀족들의 희생은 '군 면제는 신의 아들, 공익근무는 사람의 아들, 현역은 어둠의 자식'이란 자조를 삼키고 있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국방부가 공무원 채용 및 공기업 입사시험에서 군 복무자에게 가산점을 주는 제도를 부활시키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 내년부터 여성도 지원할 수 있는 사회복무제도가 시행되는 것에 맞춰 사회복무경력 점수를 새로 만들고 군 복무자에게도 그에 걸맞은 점수를 주겠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벌써부터 논란이 일고 있다. 남성은 병역의무에 따라 군 복무와 사회복무를 하는 반면 여성은 '선택'하기 때문에 평등권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또 헌법재판소가 지난 99년 "군 복무는 국방의 의무일 뿐 특별한 희생이 아니다."며 위헌 판결을 내린 만큼 가산점 제도 부활의 법적 근거도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군 복무로 돈 못 벌고 공부 못한 보상은 누가 해주나.'라는 불만부터 '군 복무가 특별한 희생이 아니라면 여성도 군에 보내라.'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다시 제기되고 있다.

국방부는 사안의 민감성 때문에 황급히 부인 공시를 냈지만 이를 둘러싼 찬반 양론은 간단히 덮어질 사안은 아닌 것 같다. 군 복무는 명예로운 것이지만 '돈 못 벌고 공부 못하는' 기회손실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대통령도 군 복무를 "썩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 군 복무 가산점제를 둘러싼 논란의 재점화를 계기로 군필자의 기회손실에 대한 보상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어둠의 자식'에게 어느 정도의 보상을 해주는 것이 우리 모두가 갖춰야 할 최소한의 예의이자 의무가 아닐까.

정경훈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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