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말과 글이 흐르는 풍경)어떤 주례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정초만 되면 너나없이 입에 달고 다니는 덕담입니다. 늘 만나는 이웃들과도 반갑게 손을 잡고 서로 복을 건넵니다. 이처럼 인심 좋게 주고받는 '복(福)'을 국어사전에서는 '아주 좋은 운수', '하늘이 정한 운수',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천운' 등으로 풀이합니다. 말하자면 사주명리학의 영역이지요. 따라서 운명론적 사유의 자식인 이 복은, 우리 인간이 선물처럼 주고받을 수 있는 게 아니지요. 그리고 이 덕담의 풀이말이 '받으세요'입니다. 복을 나눠주는 이가 누구인지, 또 그가 복을 정말 나눠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많이 받으라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참 무책임한 말로 들립니다.

그래서 이 덕담이, 고등학생에게는 기말 고사, 모의고사, 수능시험에서 전혀 모르는 문제도 잘 찍어 맞추는 요행을 잡으라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고, 허리가 가는 샐러리맨에게는 로또 복권에라도 당첨되는 행운을 얻어 졸지에 큰 부자라도 되라는 냄새가 풍기지요. 또 하루 담배 두 갑을 태우고 저녁마다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시더라도 건강 복을 받아 늘 강녕하라는 뜻으로도 들립니다.

오천석 박사가 펴낸 책에서 읽은 이야기인데요. 한 아주머니가 교통사고로 하루아침에 태산 같던 남편과 토끼 같은 자식들을 잃고 홀로 세상에 남겨집니다. 죽지못해 살아가는 삶이라 세상과 높은 담을 쌓다보니 생활 구석구석에 축축한 그늘만 첩첩이 쌓일 수밖에요. 그런데 이 아주머니가 어느 날 신문 광고란을 보고 어느 고아원에 후원금을 보내기 시작합니다. 몇 달이 지나 그 고아원 아이들한테서 고맙다는 편지가 오자, 상기된 아주머니는 더 많은 후원금을 보냅니다. 또 얼마 후, 고마운 분의 얼굴을 사진으로라도 보고 싶다는 고아들의 편지를 받고 정말 오랜만에 거울 앞에 섭니다. 그리고 거울 속에서 마귀할멈 꼴이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미장원엘 가고, 새 옷을 사 입고 화장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변화가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고 또 아주머니 스스로 이웃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면서 삶의 활기를 되찾아 종내에는 직장에서도 승진을 하고 멋진 신사를 만나 재혼까지 하게 됩니다.

이 아주머니가 말년에 누린 행복의 단초가 고아원 아이에게 나눠준 작은 베풂에서 시작되었듯이, 복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지어가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인간의 행불행을 산출해내는 계산기는 철저히 인과응보의 원리에 따라 작동되는 듯하니까요. 구정이 다가옵니다. 카지노와 바다이야기 냄새가 폴폴 나는 새해 덕담을 이제 이렇게 수정하는 것이 어떨까요? "새해 복 많이 지으세요."

김동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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