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경옥입니다] 러브레터

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됐던 일본의 이와이 슌지 감독 작품 '러브레터'는 흰 눈송이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운 영화다. 동명이인을 혼동하여 잘못 배달된 한 통의 편지. 서로 모르는 두 여자는 한 남자에 대한 추억을 공유하게 되고 이를 통해 각자의 가슴 속 상처와 그리움을 치유해 나간다. 하얀 雪原(설원)마냥 때묻지 않은 純情(순정)이 각박한 세태에 짠한 여운을 남겨준다.

우리 삶에서 사라지는 것들 중 하나로 러브레터도 꼽히지 않을까 싶다. 하얀 종이, 또는 연분홍빛 종이에 또박또박 써내려간 편지! '戀愛(연애)'라는 말 자체가 비밀스럽게 여겨졌던 지난 시절엔 이성간 편지란 남몰래 살그머니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어니언스의 노랫말처럼 "말 없이 전해주고 달아난~" 그런 것이었다. 밤새 끙끙거리며 쓴 편짓글을 이튿날 읽어보면 그 유치찬란함에 얼굴 붉히며 구겨버려야 했던 일,빨간 우체통 앞에서 망설이다 결국 띄우지 못한 편지들도 있을 것이다. 상자 속 깊숙이 간직된 분홍 편지들. 한 때는 타오르던 불꽃이었으나 지금은 재가 되어 누워있다. 하지만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그리운 순수지대!

인터넷이 일상화 되면서 손 편지는 정말이지 보기 힘들어졌다. 더구나 절절한 사랑의 감정이 밴 러브레터는 거진 희귀종이 됐다. 卽物(즉물)적 사고와 행동양식에 익숙한 요즘 젊은이들은 며칠 또는 몇 달씩, 때로는 영영 오지 않는 답장을 기다리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컴퓨터 자판기나 휴대폰으로 따다닥 두들기면 전광석화처럼 답신이 날아드는데 뭣땜에 종이를 펴들고 편지를 쓸 것인가.

요즘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 휴대전화와 메신저를 이용한 러브레터가 인기라고 한다. 짧고 자극적이며,性(성)적인 세칭 '섹스트 메시지(Sext Message)'가 대세라나. 연애편지 작문 사이트로 인기높은 'e 크러시'가 이번 밸런타인 데이에 가장 애용될 것으로 뽑아낸 문구들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맙소사(OMG:Oh,My God)', '당신 정말 화끈해(You're so hot)' . '당신은 대량 살상무기야(You're a WMD)'…. '사랑해(I love you)'마저 길다고 'ILU'로 줄여보낸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사랑의 진정성과는 거리가 멀다. 러브레터의 진화가 아니라 퇴보다. 이러다간 '사랑'의 원형질 마저 변질되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전경옥 논설위원 siriu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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