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욕탕
1970년대 아이들은 목욕을 자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목욕을 했다하면 요즘처럼 샤워정도로 마치는 게 아니라 '이태리 타월'로 때를 박박 밀었다. 명절 앞이면 누구나 목욕탕과 이발소엘 갔다. 그래서 명절 전날 목욕탕은 인산인해를 이뤘고, 앉을 자리를 찾기도 힘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명절 이틀이나 사흘쯤 전에 목욕탕에 들러도 됐겠지만 당시엔 굳이 명절 전날 목욕탕을 찾았다. 그래야 다음날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들 앞에 뽀송뽀송한 얼굴을 내밀 수 있었다.
초등학생쯤의 아이들은 누구나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엘 갔다. 아이들끼리 보내면 제대로 때를 밀지 않고 장난만 치다가 돌아오기 때문이다. 당시 아버지들은 고달팠을 것이다. 둘 혹은 셋이나 되는 아이들의 때를 밀려면 어지간히 체력도 좋아야 했을 것이다.
아프다고 고함치는 아이들, 나무라는 아버지들, 급기야 찰싹찰싹 등짝을 후려치는 아버지들, 예상보다 세게 맞는 바람에 울음보가 터진 아이들, 무례하게 옆 사람에게 물을 마구 튀기는 사람들…. 명절 전날 목욕탕은 그야 말로 북새통이었다.
팔이며 목에 피가 맺힐 정도로 박박 때를 밀어도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의 핀잔을 들어야 했다.
"이게 뭐꼬? 때를 순 불리기만 했네?"
딴엔 열심히 아들의 때를 밀었던 아버지도 말이 없었고, 맞아가며 때를 뺀 아이들도 말이 없었다. 때가 벗겨지기는커녕 불었다가 만 모양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 줄서기
1970년대 80년대 아이들은 설날을 몹시 기다렸다. 특별한 군것질거리도, 놀 거리도 없던 시절 설날은 풍요와 즐거움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냥 즐거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줄서기 과업이 복병처럼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는 요즘처럼 시장이나 대형 소매점에서 강정이나 가래떡(떡국떡)을 손쉽게 골라드는 세월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물에 불린 쌀을 소쿠리에 담아 집을 나서면 아이들은 그 뒤를 따라가야 했다. 어머니들은 바빴고 아이들은 할 일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머니는 쌀 담은 소쿠리를 떡집 앞에 길게 늘어선 소쿠리 행렬 맨 뒤에 갖다놓고 아이 손에 돈을 단단히 쥐어 주었다. 아이들은 줄 맨 뒷자리에서부터 한 칸씩 한 칸씩 앞으로 나아가 가래떡이 뽑혀 나오기를 기다렸다. 족히 반나절을 기다리는 중노동이었다. 보통 줄이 두 개 혹은 세 개쯤 됐는데, 내가 선 줄이 다른 줄에 비해 턱없이 늦게 줄어들 땐 세상에 대해 분노하기도 했다. 줄서기 과업은 가래떡 뽑기뿐만이 아니었다.
강정도 만들어야 했다. 쌀과 콩을 튀기기 위해 길고 긴 줄을 서야했고, 튀긴 쌀을 엿과 버무려 강정을 만드는데도 줄을 서야 했다. 단순히 줄을 서는 일도 힘들었지만 새치기하는 아줌마들이 아이들을 고통스럽게 했다. 적당히 끼여들 자리는 살피던 아줌마들은 어린 아이들 앞에 슬그머니 끼여들면서 '학생아, 아줌마가 너무 바빠서 그렇거덩?' 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아이들의 침묵을 동의로 이해했다.
◇ 아쉬운 곶감
설날엔 먹을 게 넘쳤지만 설날이 지나고 나면 군것질 거리는 곧 사라졌다. 아이들은 차례가 끝나고 나면 어머니 앞에 서서 맛있는 떡과 곶감, 문어 다리 따위를 받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하루만에 먹어치우지 않았다. 두고두고 아껴가며 먹기 위해 자기만의 공간에 숨겨두었다.
아이들은 까마귀만큼 분명하게 숨겨둔 음식을 기억하지는 못했다. 한 달이나 두 달이 지나, 날씨가 따뜻해져서 곰팡이 핀 곶감을 발견하면 억울해했고 낙담했다. '매는 먼저 맞는 게 낫고, 곶감은 나중에 먹는 게 낫다.'는 말은 빈말이다. '매는 늦게 맞는 게 낫고, 곶감은 먼저 먹는 게 남는 것이다.'는 진리를 알 때쯤엔 어른이 돼 있다.
◇ 세뱃돈
설날이 즐거운 것은 맛있는 음식보다 세뱃돈 때문이다. 아이들은 세배를 하고 일어서는 동안, 세배를 받는 어르신의 무병장수와 만복을 기원하기 보다 그의 주머니에서 나올 세뱃돈을 헤아렸다. 얼마나 주실 것인가.
차례를 올리느라 일가친척의 집을 돌 때마다 아이들은 세배하고 세뱃돈을 받았다. 차례 올리기가 끝나면 동네 어른들 집으로도 일일이 찾아가 입으로만 무병장수와 만복을 기원했다. 어른들도 세뱃돈으로 책정해놓은 금액이 있었기 때문에 일찍 찾아뵙고 세배를 올리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집안의 차례가 빨리 끝나기를 기원했다. 차례를 일찍 마친 아이들 중에는 세뱃돈을 더 받기 위해 이미 세배를 올린 어른에게 다시 세배를 감행하기도 했다. 어른들은 그 속을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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