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강유정의 영화세상] 사랑해, 파리

귀엽고 깜직한 영화 '아멜리에'의 제작자가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이름만 대도 알만한 감독 18명을 모아 5분 내외의 작품을 만들어 보자. '사랑해, 파리'는 각각의 인정이 뚜렷한 18명 감독의 옴니버스영화이다. 아니 옴니버스라기 보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나 모자이크라고 보는 편이 더 옳을 듯 하다.

이 작품에 참여한 감독들의 필모그래피를 간단히 살펴보면, 이 화려함이 저절로 드러난다. 세느 강변에서 아랍계 여성에게 한 눈에 반한 프랑스 청년, 시종 일관 유머러스하고 발랄한 이 작품은 '슈팅 라이크 베컴'의 거린더 차다 감독 작품이다. 프랑스어가 서툰 미국인 청년에게 고백한 프랑스 게이의 흥미로운 해프닝은 '엘리펀트'의 감독 구스 반 산트의 솜씨다. 코엔 형제, 올리비에 이에야스, 빈센조 나탈리, 알렉산더 페인 등 그 이름만으로도 21세기 영화사가 성립될만한 거장들의 솜씨가 5분 안에 녹아있는 셈이다.

18편의 작품들은 하나의 이야기 구조 안에 녹아있다기 보다 파리의 20개 구역에서 펼쳐지는 사랑의 단편들을 모아놓았다. 파리에 가면 사랑에 빠진다라는 속설 속에 수많은 연인들이 만나고 헤어진다. '사랑'이 주제인만큼 사랑에 대한 감독의 개성있는 접근법과 가치관이 녹아있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유머러스한 사랑부터 오해, 불만, 그리고 이민자의 가슴아픈 현실까지 '사랑해, 파리'는 파리라는 공간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갖가지 경우의 수를 제공한다.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이 영화가 인상적인 에피소드들로 기억될 것으로 추측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18편이 대개 흥미진진하지만 특히 주목할 만한 몇 편의 에피소드가 있다. 우선 코엔 형제의 작품이 그러한데, 언제나 낙오자 역할을 했던 스티븐 부세미의 연기 또한 일품이다. 미국 여행객이 틸튀리 역에서 전철을 기다리며 관광책자를 읽고 있다. 관광 책자는 파리의 아름다운 면과 함께 주의해야 할 사항들이 적혀있는데 갑자기 그 자리에서 그 모든 주의사항이 발생한다. 낯선 여행객이 겪는 공포와 당황스러움을 이 짧은 단편은 효과적으로 제시해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밌다.

'나 없는 내 인생'의 이자벨 코이셋 감독의 작품 역시 주목할 만하다. 아내에게 이별을 고하려던 순간 아내의 병을 알게 되고 이에 발목이 묶이고 만다. 곧 죽을 텐데, 잘해주자라고 마음을 먹는 남편. 그런데 정말 사랑하려다 보니 사랑하고 만다. 이내 아내의 죽음이 삶의 큰 함정이 되고 만 남자, 유머러스하면서도 융숭깊다.

'롤라 런'에서 보여주었던 현란한 편집술과 시간의 아이러니를 보여준 톰 티크베어의 생 드니 외곽의 사랑 이야기도, 자신의 아이를 보육원에 맡기고 다른 사람의 아이를 보러 가야하는 이민자의 눈빛을 그려낸 16구역 역시 인상적이다.

무엇보다 가장 가슴을 두드리는 작품은 바로 알렉산더 페인의 작품인 14구역이다. 배열상 맨 마지막에 놓인 이 작품은 외롭고 소루하게 살아온 한 여성의 꿈만 같은 프랑스 여행기를 그려내고 있다. 프랑스에 여행을 하기 위해 불어를 배우고 혼자인 것 역시 멋진 고독으로 포장될 수 있다는 말에 희망을 갖고 온 전직 우체부 여성. 하지만 내려다 보이는 파리 정경을 나눌 동반자가 없어 쓸쓸하고, 머나먼 이방에 놓인 외딴 섬 같아 외롭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오후 공원 벤치에 앉아 고백하는 그녀의 사랑은 외로움과 쓸쓸함을 깊이 느껴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공감을 선사한다.

'사랑해, 파리'는 한 마디로 감독들의 엔솔로지북이자 단편선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관객을 감동시키고 자신의 개성을 표출하기에 5분이라는 시간이 결코 짧지 않다는 사실이다. 훌륭한 감독들의 인상적 조우,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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