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 더 이상 즐겁지 않다고 느끼기 시작할 때부터 우리는 늙는 것일까. 누구나 어느 시점을 경계로 명절이 거추장스럽다 느끼는 것도 사실이며 그런 현실인식 역시 나이 들어가는 징조이기도 하다. 그렇게 즐겁지 않다고 느끼는 그 경계는 아마 권리보다 책무가 많아지는 바로 그 시점일 게다. 그때부터 명절은 즐거움 대신 고단한 노역이 되는 것이다.
풍성한 먹거리와 느슨해도 좋은 일상, 며칠간의 연휴를 즐기던 과거의 달콤했던 명절은 삶의 변화와 함께 퇴색되었다. 먹거리는 사철 어느 곳이나 산재해 있으며 가족의 의미도 무조건적 관계에서 다소 이기적인 관계로 변했다. 따라서 복잡해진 인간관계와 현실의 구조가 어떤 면에서 명절을 오히려 억압이자 불청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반복되는 전국대이동은 무얼 말하는 걸까.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서 내일이 지나면 설날이다. 연휴가 시작된 것이다. 명절의 번잡스럽고 전쟁 같은 치러냄이 곤혹스럽다는 투정에 혼자 사는 이가 말했다. "관계한다는 건 아름다운 것"이라고. "혼자 있어보면 안다. 가까이 아무도 없다는 생각, 명절인데 갈 곳도 만날 이도 없다는 사실은 죽음처럼 참담하다"고.
사람은 누구나 혼자임을 강렬하게 원하면서도 결국 혼자 일 수 없는 한계 역시 스스로 알고 있다. 무리지어 살아가지만 저마다 홀로 섬이다가 문득 가족이나 혈육이 그리울 때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그리고 돌아가면 반길 이가 있다는 건 축복이다. 고작 며칠간의 연휴, 교통대란을 무릅쓰고 길을 나서는 것과 번한 선물 꾸러미지만 손에손에 들고 귀향길에 오르는 것은 관계들이 주는 힘이고 관계지킴은 그나마 남은 우리 전통의 미덕 아닐까.
설날! 하면 떠오르는 떡국, 따뜻하고 맑은 국물에 새하얀 떡이 동동 뜨고 쇠고기 꾸미와 계란지단과 부순 김이 살짝 올라온 떡국 한 그릇에 대한 의미는 시대가 가도 변한 것 같지 않다. 사철 어디서나 떡국 먹는 일이 가능해졌다 해도 설날 아침 차례를 끝내고 먹는 떡국과는 다르다. 설날 떡국에는 가장 아름다운 관계인 어머니가 스며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처럼 뭐랄까, 의무와 책무가 다소 무거워도 반복할 수밖에 없는 명절의 아이덴티티는 우리가 잊고 있던 고향의식이며, 우리들 심중의 한 공간만이라도 그 그리움의 관계를 지속하고 싶은 욕구라 하겠다. 오랜만에 만나는 혈육들은 어떤 이유도 지워버릴 만큼 살갑다. 떡국과 윷놀이와 시끌벅적한 웃음소리와 고소한 기름 냄새와 그리고 어머니, 존재하든 부재하든 그 속에 어머니가 있지 않은가.
이규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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