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서가에서-노인은 책과 같다

어느 가톨릭교회의 사사제작 의뢰를 받고 편집위원들과 첫 미팅을 하던 날, 참석한 편집위원들을 보고 잠시 놀랐던 적이 있다. 편집장을 비롯한 편집위원들이 대부분이 연로한 어르신들이었다. 아흔이 가까운 어르신이 고문이었고, 칠순이 지난 분이 편집장, 맹렬히 움직여야 할 편집위원들은 대부분 예순 살 안팎이었다.

기획과 자료조사, 사진원고 정리, 원고 집필, 윤문과 교정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단계로 진행되어야 할 이 작업이 연로하신 어르신들에게 가능한 일일까 걱정이 앞섰다.

처음 예상했던 것처럼 작업의 속도는 꽤 느렸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날 무렵부터 고문과 편집장 두 어르신은 단편소설 한 권 정도의 원고뭉치를 가지고 정확하게 이 주일에 한 차례씩 출판사를 방문하셨다.

철저한 자료조사와 진중한 고증으로 탄생한 그 책은 70주년을 3년이상 넘기고 완성되었다. 제작기간만 4년이 걸렸고, 수기로 작성한 원고량도 엄청났다. 그분들의 애정어린 사관(史觀)으로 지나온 역사의 발자취를 기록하고 또한 미래를 조망하고 예견하는 결과물을 만들 수 있었다.

이후 가톨릭교회사를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느리고 긴 호흡의 결과물의 가치를 알아주었다. 현재 대구가톨릭교구 설정 100년을 사년 앞두고 있고, 그분들과의 작업이 10년쯤 전의 일이니 그분들의 삶 자체가 대구가톨릭교구사의 한 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일을 계기로 사사에 깊은 매력을 느꼈고, 스무권 가까운 사사를 제작했다.

몇 해 지나 고문을 맡으셨던 어르신의 부고를 들었다. 마음 한 켠에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를 들렸다. 어느 학자의 표현처럼 노인 한 사람이 사라지는 것은 인생의 중요한 도서관 하나가 문을 닫는 것과 같다는 말이 생각난다. 어느 노인이 자녀들에게 가르쳐 온 것은 그 자체로 교육학 책이고, 그들이 가정을 이끌어 온 것은 그 자체로 경제서적이고, 그들의 지나온 삶 자체가 역사책인 것이다.

노인의 살아온 삶은 지혜 그 자체이며, 노인들의 삶의 지혜는 책과 같고, 도서관과 같다. 그러한 노인을 존중한다는 것은 책에 대한, 진리에 대한 존중이 아닐까 한다.

도서관에 가면 고유의 향이 있다. 책에서 묻어나는 옛날 냄새가 난다. 거기에는 삶을 깊이있게 살아온 이들의 진지함이 있기 때문이다.

나윤희(홍익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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