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 세월 흐르는 소리

세월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바람이 흘러들지 않는데도 세월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남녘에는 이미 유채가 피고 매화가 망울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 반가운 춘신 속에서 설을 맞게 되니 기쁘기 이를데 없다.

오랫동안 전해오는 풍습이란 참으로 이상한 것이어서 양력설과는 비교가 안 되게 어수선하고 활기차다.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우리 기억에 남아 있는 옛설은 더욱 요란스러워 섣달에 접어들면 벌써 분위기가 바뀐다. 모두 손으로 장만해야 하는 시절이라 엿을 고고, 강정 수정과 유과를 지져야 하고 술도 빚어야 한다. 또 가족들 새옷 짓기에 밤을 새운다. 희자(囍字) 금박을 넣은 댕기를 비롯 오색실로 수놓은 저고리와 자주빛 치마, 사내아이의 바지저고리에다 허리띠를 준비하기까지 여간 공이 들지 않는다. 추사의 '세한도' 하늘처럼 맑고 차가운 초하루 아침을 맞이하면 새옷을 차려 입고는 그윽한 향내 속에 차례를 올리고 세배를 드린다. 설은 일 년중 가장 기쁜 날이기 때문에 조상께 차례를 경건하게 올리는 것이다.

초하루가 지나 벌어지는 윷놀이와 널뛰기도 말할 수 없이 즐거운 것이었다. 널뛰기는 이제 볼 수 없지만 겨우내 응어리져있던 긴장을 풀어주고 부족했던 다리운동을 하게 함으로써 육체단련에도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공중에 힘차게 솟구쳐 올랐다가 땅에 뛰어내리는 널뛰기야말로 생활리듬을 돌리는데 큰 효과가 있었다. 설 명절 담 너머로 보이는 널뛰는 광경은 정말 한 폭의 그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은 설이라 해도 이 같은 정겨움이 없다. 말이 설이지 모든 것이 돈만내면 척척 해결된다. 주문만 하면 다 된다. 설빔도 그렇고 형형색색의 한과는 물론 차례상도 그렇다. 참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편리한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몸단장을 반듯하게 갖추는 것이 간편한 것보다 더 의젓하고 기품이 있는 법이다. 편리한 것을 취하다 보면 그 편리함 때문에 보다 귀중한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 마냥 풍성하고 정감이 넘치던 옛날의 그 설날은 이제 멀리 사라지고 추억 속에서만 가물거릴 뿐이다.

생각하건대 우리는 그 시절의 설날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것은 행복에 대한 것이었다. 비록 풍요하지는 못했어도 설날 가족이 모이면 웃음꽃을 피울 수 있었고 가족들의 그 웃음 속에서 행복이 무엇인가를, 이 행복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배웠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우리의 현실은 이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나라도 편치 않고 국민생활은 더욱 말이 아니다. 굳이 자료를 갖다 대지 않더라도 나라가 지금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다.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오만, 편견에다 무능, 무력까지 해서 날이 갈수록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고물가, 저성장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가하면 취업난에 고질적인 노사분규와 이념갈등, 온갖 사회범죄의 증가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다. 거기다 교육정책의 실종으로 우리 아이들이 조기유학이다 과외다 해서 방향을 잃고 조각배처럼 떠돌고 있어 그저 서글플 따름이다. 이런데도 이 나라 현실을 위급상황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면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도층이 잘못하면 그 대가는 말할 것도 없이 국민에게로 돌아온다. 그래서 지도자는 영명해야 한다. 국민을 존중하지 않고 권력의 본질을 흉기로 바꾸어 그 칼끝을 국민의 가슴에 들이민다면 그것을 어떻게 국민의 정부라 할 수 있겠는가. 이 간단한 원리는 무슨 철학도 아니고 심오한 이론도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은 총명도 아니고 임기응변의 재치는 더더욱 아니다. 항상 정도를 가기 위한 성실성과 진정한 책임감이다. 지도층이 국정에 책임을 지지 않고 허언이나 늘어놓고 조삼모사(朝三暮四) 식의 사술이나 일삼는다면 그 국민은 고달플 수밖에 없다. 옛날의 설날이 애달프도록 따뜻하게 기억되는 것은 오늘의 우리 생활이 그만큼 황량하기 때문일 것이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이 땅에 봄이 왔는데도 왜 봄을 느끼지 못하는가. 지금 우리 주위에는 세월 흐르는 소리만이 스산하게 들리고 있을 뿐이다.

윤장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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