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태백에 사는 내 친구 정두식을 생각하면 피식 웃음부터 나옵니다. 매봉산 꼭대기에서 고랭지 채소 농사를 짓는 이 친구를 만난 건 그러니까 3년 전 동대구역에서였습니다. 그날, 서울서 내려오시는 장모님 마중을 나갔었는데 시간이 남아 역 대합실을 얼쩡거리다가 이 친구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지요. 서로가 머뭇거리며 다가가 손을 잡고 반갑다며 인사부터 나눈 뒤, '그런데 우리가 언제 어디서 만난 적이 있지?' 하며 기억의 갈피를 더듬었는데요. 이게 어찌된 일. 떠나온 고향 동네, 그 이웃 동네 이름을 들먹여도, 옛날에 다녔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이름까지 차례로 떠올려도 도대체 맞아 들어가는 코드가 없는 겁니다. 알고 보니 처음 만나는 사이였지요. 한참 동안 잡고 있던 손을 그냥 놓고 돌아서기가 멋쩍기도 하여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렇게 만났으니 우리 알고 지냅시다.'라며 통성명을 했습니다. 지금은 가족까지 서로 오가며 친척보다 더 가깝게 지내는데, 우연한 말 걸기가 참 좋은 친구를 만들어 준 셈입니다.
9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도로남'이라는 유행가가 있지요. 이 노래의 가사처럼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지우면 님이 되고, 또 남이라는 글자의 모음 하나 돌려놓으면 놈이 됩니다. 점 하나 찍거나 모음 하나 돌려놓는 일이란 결국 말 걸기의 방식에 따라 이뤄지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 풍진 세상을 아름다운 발걸음으로 건너가자면 '××할, 죽일, 똥통에 빠져 죽을, 버릇없는, 고약한, 개 같은, 호랑말코 같은, 괘심한,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질' 놈보다도, '돌아서면, 어차피, 아무래도, 갈라서는' 남보다도, '그리운, 아름다운, 소식이 없으면 궁금한,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한 백년 이웃으로 같이 살고 싶은' 님이 많아야겠지요.
한양대에서 문화인류학을 강의하는 박찬호 교수가 학생들에게 제시했다는 과제가 참 재미있습니다.이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삶의 세계가 존재하는지를 발견시키기 위해 학생들로 하여금 낯선 사람을 찾아가 대화를 트고 오늘의 그가 있기까지의 인생 여정과 그 사람의 생각과 애환을 파악 정리해 제출하라는 과제였다는데요. 흥미로운 사실은 과제를 수행한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타인들과 이외로 말이 잘 통하더라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풍성한 삶을 위해서 새해에는 따뜻한 말 걸기를 자주 시도해 볼 일입니다. 비좁은 인간관계와 자의식의 밀실에서 벗어나, 낯선 이들에게도 말을 걸며 삶의 울타리를 확장해 볼 일입니다.
김동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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