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어둠이 사위를 까맣게 뒤덮으면 저는 식당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합니다. 젖은 솜뭉치같이 늘어지는 두 다리를 붙잡고 한발 한발 내딛다보면 집 앞 약국 앞에 멈춰서게 되지요. 어김없이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 다 같이 약 먹고 죽자. 어차피 산송장같은 목숨, 파리만도 못해 죽어도 누구 하나 거들떠 보지 않을 목숨, 질기게 살어 무엇해.'
늘 그렇듯, 두 눈 질끈 감고 이를 악뭅니다. 하지만 파르르 떨리는 제 손은 이제껏 단 한번도 약국 문을 열어 보지 못했으니까요.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을 감당하지 못하는 못난 어미는 되지 않겠다고 털썩 주저앉지요. 한날 한시에 다같이 죽자는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못난 어미. 그만 주저앉아 목놓아 울어버렸지요.
제게는 남매 아이가 있습니다. 남들이 보면 다 큰 자식들이지만 제겐 뒷수발이 없이는 단 한가지 일도 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일 뿐이지요. 아들 성민이(29),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 막내는 벌써 2년 째 병석에 누워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간질 증세를 보이긴 했지만 실업계 고등학교도 졸업하고 2년제 대학도 다녔던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제 어미 아비도 못 알아보는 산송장이 돼 버렸지요. 간질이 악화됐고 정신지체 장애인이 됐습니다. 종일 누워서 주는 음식을 받아 먹고, 기저귀에 대소변을 보는 두살배기 아기처럼···. 저는 혹시 욕창이라도 생길까봐 끼니 때마다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아들의 몸을 어루만져줘야 합니다. 눈동자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아들, 이 때만큼은 천진난만한 밝은 표정을 보이곤 하지요.
세상에서 가장 이뻤던 딸 민희(31)는 병든 아빠와 동생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던 우리 집 보배였지요. 하지만 하늘은 참 가혹하더군요. 5년 전, 병원에서 약한 간질 증세를 보이던 딸아이의 뇌세포가 서서히 죽어간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하나 둘 기억을 잃어가던 민희는 이제 누가 잡아주지 않으면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는 신세가 됐지요. 넘어져 생긴 멍자국이 몸에 가득 찬 우리 딸. 서른, 저 꽃다운 나이에 치매를 앓는 우리 딸. 이건 너무 가혹하지 않습니까. 제발 우리 딸만은 되돌려 주면 안되시나요.
목수였던 남편(63)은 이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참 오랫동안 남편은 온갖 병을 몸에 지닌채 살아왔지요. 젋었을 땐 결핵성늑막염을 앓았고 6년 전엔 직장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간에 생긴 물혹은 날이 갈수록 커져갔고, 투석 치료 중인 신장은 이제 제기능을 못하게 돼 버렸습니다. 그 고통의 세월을 어찌 참았을까. 얼마 전 직장암도 재발했지만 당뇨로 인해 남편은 더이상 수술도 할 수 없다고 하네요. 생의 마지막을 정리하고 싶다는 남편이 아이들을 돌보겠다고 나섰지만 자기 몸 하나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그에게 건장한 우리 아이들은 언제나 감당하기 힘든 짐일 뿐이지요.
'엄마에게 아프다고, 괴롭다고 말이라도 해봐. 세상은 참 야속하다고 소리쳐봐. 왜 우리 아이들의 영혼을 앗아가는 겁니까. 왜 우리 아이들의 그 순하디 순한 정신을 뺏아가는 갑니까. 차라리 날 데려가세요. 날 죽여주세요.'
세상을 향한 절규도 남편의 눈물자국을 보는 순간 끝을 맺곤 하지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남편의 얼굴에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눈물만이 흘러내립니다.
20일 오전 10시 대구 수성구 신매동의 나숙희(가명·58·여) 씨 집을 찾았다. 나 씨는 이 날도 아들 성민 씨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있었다. 180cm에 90kg을 육박하는 아들을 홀로 씻기고 입히느라 나 씨는 상당히 지쳐 보였다. "욕심 없어요. 우리 성민이가 엄마라도 알아보는 것, 그게 전부예요." 나 씨는 아들의 기저귀를 갈고 나서 곧 남편의 식사를 챙겼다. 민희 씨는 벽에 몸을 기대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 씨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엔 금세 죽음이 엄습할 것만 같았다. 나 씨의 집에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허덕이는 가족들의 소리없는 절규만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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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미기자 bor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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