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조두진이 만난 사람들] (주)영화사 '아침' 대표 정승혜

영화 배우 안성기씨와 박중훈씨, 영화감독 이준익씨는 닮은 구석이 있다. 텔레비전에서 이들의 인터뷰를 볼 때, 이들의 영화를 볼 때마다 자주 그런 느낌을 받는다. 말하자면 이 세 사람은 '막힌 데 없는 사람, 나이스한 사람' 같다. 이런 내 짐작이 별로 틀리지는 않았다. 이전에 이준익 감독을 만났는데, 짐작한 그대로 막힌 데 없고, 나이스한 사람이었다. 이 세 사람만큼 텔레비전에 많이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이들과 한 패거리인 사람이 또 있다.

(주)영화사 '아침' 대표 정승혜씨.

나이 마흔이 넘은 여자인데 장난꾸러기 머슴애 같다. 외모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다. 앞의 세 사람과 마찬가지로 정승혜씨 역시 막힌 데 없고 나이스한 사람이었다. 정승혜, 박중훈, 안성기, 이준익 이렇게 4인조 패거리는 16년 동안 함께 몰려다니며 영화를 만들었다.

정승혜씨는 영화 카피를 많이 썼다. 800여 편.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결혼 이야기' '투캅스' '왕의 남자' '투사부 일체'등 충무로 화제작 대부분이 그녀의 카피다. 디자이너로 출발했지만 다른 사람 카피보다 자신의 카피가 더 낫겠다 싶어 시작했다. '받은 만큼 드릴게요.' '정말이지 착하게 살고 싶었어요.' 친절한 금자씨의 이 섬뜩한 카피 역시 그녀의 솜씨다. 2005년 영화사 '아침'을 열었고, '도마뱀', '라디오 스타'를 제작했다. 새 살림을 차렸지만 16년 지기 이준익 감독과 여전히 사무실을 나눠 쓴다. 두 사람이 감독과 제작자로 만든 첫 작품이 '라디오 스타'였다.

영화배우 박중훈이 '가장 친한 친구'라고 말하는 여자, 그래서 자신도 '박중훈이 가장 친한 친구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아, 그렇게 말한다는 여자. 정승혜 대표는 얼굴의 점을 못 빼는 이유와 귀에 귀걸이 구멍을 못내는 이유를 오직 '아플까봐' 라고 했다. 장난기 어린 얼굴만큼이나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 소년 같은 마흔 두 살 여자

마흔 두 살 먹은 여자라…. 대충 중년 여성일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틀렸다. 그녀는 아이처럼 웃고, 아이처럼 말했다. 상당히 어려 보이며, 미인이라고 추켜세우자, '미인은 무슨…'이라고 겸손한 척 하더니 금세 '하긴 65년 생이 이 정도면 상태 괜찮은 편이지. 나이 속이고 연애 좀 해야겠다.'고 저만큼 앞서 가 버린다. 잡지에 나온 사진보다 실물이 낫다고 하자, 사람 보는 눈이 참 밝은 기자라고 아낌없는 칭찬도 했다.

인터뷰 중에 카메라 플래시가 자주 터졌는데, '아, 나는 왼쪽 프로필이 더 낫죠. 왼쪽을 부각시켜 주세요.'라며 얼굴을 돌리기도 했다. 못 나온 사진을 신문에 실으면 대구까지 항의 방문하겠다고 했다.

정승혜씨는 어려 보여서 약 올랐던 적이 많았다고 한다. 택시를 타면 기사들이 슬그머니 반말을 했다. 화가 나서 내리기 전에 꼭 나이를 밝혔다. 반말하지 말라는 시위였는데, 막상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보니 반말 해주는 사람이 오히려 좋더란다.

정승혜 대표는 '나이 먹는 게 고맙다.'고 했다. 변해 가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게 기쁘다는 의미였다. 나이를 먹으면 '고맙다'는 말보다 '수고했습니다.'는 말을 자주 하게 되고, 자리를 찾기보다, 마련해놓은 자리에 앉게 된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씌어주는 우산 속에서 비를 피했는데, 이제는 누군가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사람이니 그런 느낌도 좋다고 했다.

"저는 오야지를 잘 만났죠. 오야지 이준익 감독이 늘 우산을 씌어줬어요. 비 맞지 않고 일만 할 수 있게요. 저도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요. 식구들이 일에만 몰두할 수 있게 하는 사람,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그럭저럭 해내니 기뻐요."

그녀는 사람이 사람을 키우는 도제 시스템을 좋아한다고 했다. 자신이 대표인 영화사 '아침'의 모토 역시 '사람'이라고 했다.

"영화는 혼자 만드는 게 아니거든요. 천천히 가더라도, 설령 작품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일하는 사람이 행복한 곳을 만들고 싶어요. 첫째도 사람, 둘째도 사람입니다."

정승혜씨는 '일생 화를 내지 않는다.'고 했다. 화날 일이 적고, 야단을 잘 못 친다고 했다. 그냥 스스로 반성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은 별로 장려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학창시절 '몇 대 맞을래?'하고 묻는 선생님이 싫었다. 사실 안 맞고 싶은데, 한 대는 염치없고, 열 대는 몸이 힘들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아직 배우는 학생에게 그런 난제를 던지는 것은 가혹하다. 차라리 알아서 몇 대 때리는 게 낫다.'

정승혜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죠? 스스로 반성하게 하는 건 가혹하지…."라고 했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녀는 야단치지 못할 것 같았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어떻게 직원을 야단칠 수 있을까.

◇ "멜로보다 남자들 이야기 편해"

정승혜씨는 여성적이기보다 남성적인 스타일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살지만 바깥에서 겪는 일을 거의 말하지 않는다. 힘든 일이 생기면 특히 입을 다문다. 흔히 딸들이 엄마에게 하루 일을 시시콜콜 들려주는 모습과 다르다. 힘든 과정이 다 지나고, 좋은 결과가 나오면 그때야 이야기를 한단다. 나쁜 일 뿐만 아니라 좋은 일조차 말하지 않아 어머니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한번은 엄마가 은행에 가셨다가 잡지에서 제 인터뷰 기사를 보셨나봐요. 아주 좋은 기사였대요. 엄마는 '내 딸이 이렇게 잘났다는 말이냐? 이렇게 잘난 내 딸이 왜 잘난 척을 안 했단 말이냐? 어째서 동네방네에 내 딸 자랑할 기회를 주지 않았단 말이냐?' 하시며 따지기도 했어요."

그녀가 이준익 감독과 콤비를 이뤄 만든 영화 '라디오 스타'는 한물간 록 스타와 그 곁을 묵묵히 지키는 매니저의 이야기다. 말하자면 남성간의 우정을 다룬 버디 드라마다. 영화를 보고 감동하는 쪽은 여성이 많지만 '라디오 스타'는 30대, 40대 남자들이 감동을 받았다. 그 또래 남자들의 마음을 잘 읽어냈다는 말이다. 그런 영화를 여성인 그녀가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남자 같은 스타일 덕분인지도 모른다.

"저는 사실 멜로는 약해요. 차라리 남자들 이야기가 편해요."

그녀는 웬만하면 택시를 탄다고 했다. 택시에 관해서는 좋은 기억이 많지만 나쁜 기억 하나. 여기서도 그녀의 남성적 성향이 드러난다.

택시 기사가 말이 아주 많았다. 자신의 화려한 이력에 대해, 정치가들에 대해, 경제에 대해, 자신의 주먹에 대해, 특히 마음에 안 드는 손님을 만나면 반드시 차를 세우고 패 준다는 이야기에 대해, 그래서 경찰서에 자주 들락거린다는 것에 대해 거친 말을 많이 했다.

보통 여자라면 어서 목적지에 도착하고, 어서 내리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정승혜는 내리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그럼 아저씨는 누가 패줘요?"

택시기사의 대답, '하느님과 나 자신만 나를 팰 수 있다.' 기가 막힌 정승혜씨는 '내가 그 기사를 팰 뻔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그녀는 남성의 일반적인 관심사인 정치엔 무관심했다. 정치와 관련해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대통령 이름뿐이라고 했다.

◇ 스타보다 더 인기 있는 일반인

정승혜씨는 영화배우도 탤런트도 아니지만 1년에 60만 명의 방문을 받는 블로그 주인이다. 조선일보 블로그 '정승혜의 사자우리'. 소재는 정해져 있지 않다. 내키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후닥닥 글을 써서 올린다. 이곳에 모아둔 글과 사진을 '정승혜의 사자우리'라는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그녀가 시종일관 주장하는 바는 '재미있게 살자' '10분 일하고 50분 놀자'이다. 싫은 건 안 한다는 좌우명으로 흔히 나이 따라 하게되는 결혼도 안 했다. 그녀는 블로그에서, 또 일상에서 재미있게 사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님을 조용히 보여준다.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사진도 찍고, 농담도 한다.

정승혜의 말과 글은 아름다움이나 깊은 철학이 아니라, 자유로움과 사소한 일상의 통찰을 강조한다. 놀 듯 글을 쓰고, 놀 듯 일을 한다. '30분 이상 글을 쓰면 뇌에 신호가 온다.'는 그녀는 후닥닥 쓰고, 돌아보지 않는다. 누군가 자신의 글을 읽고 '날 오해하면 어쩌지?'하는 소심한 생각은 안 한다고 했다. 그렇게 대충 쓰는 글이라면 형편없겠지? 그렇지 않았다. 빨리 쓴 탓에 몇몇 군데 사족이 있었지만, 일상의 통찰에서 나온 솔직한 글이어서 짠한 울림을 주었다.

세상에 글 쓰는 사람은 많다. 그런데 정승혜처럼 놀아가면서, 부지런히 쓰는 사람은 드물다. 그녀는 마케팅 책임자, 제작자, 디자이너, 카피라이터 등 1인 다역을 하면서도 수많은 글을 써왔다. 블로그 '정승혜의 사자우리'에 매일 글을 올릴 뿐만 아니라 월간 '프리미어'에 2년 동안 '정승혜의 무비 카페', 영화 사이트 엔키노에 '정승혜의 영화수첩', 동아일보에 2년간 '정승혜의 무비카툰', 조선일보에 1년 6개월 동안 '정승혜가 찍은 사람'을 연재했다.

그러나 웬만해서는 원고 청탁에 응하지 않는다고 했다. 일단 응하면 잘 써야하고, 오래 써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연재는 1년 이상 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해요. 1년 이상 연재해도 독자들이 싫증내지 않을 만큼 잘 써야 하고, 그만한 내공도 있어야 해요. 그러니 함부로 원고청탁에 응할 수 없는 것이죠." 정승혜 대표는 기자들 사이에서 '손댈 것 없는 필자'로 알려져 있다. 내용, 원고량, 마감시간 등 더하고 뺄 게 없다는 말이다.

△ 정승혜는…

1965년 서울 출생. 1989년 영화 일을 시작, 1991년부터 이준익 감독의 씨네월드에서 영화 포스트 디자이너, 카피라이터, 마케터, 영화 칼럼니스트로 일했다. 아나키스트, 달마야 놀자, 황산벌 등에서 제작이사로 참여했고 2005년 영화사 '아침'을 차렸다. 영화 '도마뱀'과 '라디오 스타'를 만들었다. 2007년 새 영화 '궁녀(김미정 감독)' '님은 먼 곳에(이준익 감독)'를 준비중이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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