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세기의 추억] ⑦쇠죽 끓이는 풍경

사료에 밀린 쇠죽 편기에 밀린 온기

아버지는 오늘도 쇠죽솥 아궁이에 불 지피신다. /마른 솔잎 밑불 만들고 /솔가지 꺾어꺾어 얹으신 후 /장작개비 몇 개 던져 넣으신다. /매운 연기에 눈물 몇 방울 훔치시고 /후후 입부채로 불 일으키신다. /어설프게 타오르던 장작도 /활 활 온몸을 태우기 시작한다.

시골에서 살아본 이들에게는 소 만큼 아련한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 것도 없다. 여름에는 꼴(소에게 먹이는 풀)을 벴고, 겨울에는 쇠죽 끓인 물에 손발을 씻었고, 팔려가는 누렁이의 뒷모습에 눈물 짓기도 했다.

요즘은 꼴 베거나 쇠죽 끓이는 풍경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싼 사료를 사서 먹이면 되는데 굳이 이렇게 번거로운 일을 할 필요가 있을까. 소 한 두마리를 키우는 작은 농가에서도 대부분 사료를 먹이고 있었다.(경북도의 경우 4마리 이하를 키우는 한우농가는 2만2천호 정도다.) 소를 키우지 않는 농가도 많았다. 의성군 점곡면 윤암리 이승희(61)씨는 "예전에는 집집마다 소를 키웠는데 노인들이 갈수록 많아지면서 마을 전체에 몇집 되지 않는다."고 했다.

예전처럼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쇠죽 끓이면서 구들장을 데우는 것은 추억속의 한 장면에 불과할까. 집은 보일러로 바뀌었고 소는 동물성 사료에 맛들인지 이미 오래다.

경북지역에서 쇠죽을 끓이는 집이 대체 어느 정도일까. 거의 없었다. 이리저리 수소문한 끝에 의성군 점곡면, 영주시 평은면에서 쇠죽 끓이는 집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전염병에 걸리지 않는다.=취재팀이 영주시 평은면 평은리를 찾은 것은 지난 6일 오전 6시 50분쯤. 해가 아직 떠지않은 어슴푸레한 새벽인데다 날씨도 몹시 추워 '너무 일찍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석정홍(80)할아버지의 집에 들어서니 아궁이의 쇠죽솥에는 벌써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석 할아버지는 소 2마리를 키우고 있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새벽, 저녁 두차례 쇠죽을 끓여 먹인다고 했다.

"소는 사람과 비슷해. 정성이 가장 중요하지. 쇠죽을 먹여야 병도 없고 살도 많이 찌지." 할아버지는 쇠죽을 끓여먹이면 전염병 예방주사를 맞힐 필요도 없다고 했다. 채식동물인 소에게 동물성 사료를 먹이니 브루셀라병, 광우병과 같은 예전에 볼 수 없던 병이 자꾸 생긴다는 것이다.

쇠죽은 보통 하루 2차례 끓인다. 소는 사람처럼 하루 3끼를 먹는데 점심 때는 아침에 끓여놓은 것을 데워 준다. 짚과 콩깍지, 쌀겨, 호박, 고구마 등을 넣어 죽처럼 만들어준다. 콩을 넣기도 하는데 단백질 부족을 염려해서다.

석 할아버지는 추운 새벽녘에 1시간 가까이 아궁이 앞에 앉아 솥뚜껑을 여러차례 열어보면서 정성스레 쇠죽을 끓였다. 할아버지는 "저놈이 들을 지 모르지만 쇠죽 먹인 소와 사료 먹인 소는 고기 맛이 훨씬 다르다"고 했다. 구수한(?) 쇠죽냄새가 나기 시작하자 소가 마치 밥을 달라는 듯 연이어 '움메~ 움메~'소리를 냈다.

의성군 점곡면 윤암리 이진두(72)할아버지도 소 2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10년된 암소가 한달전 새끼 암소를 낳았다고 한다. "요즘은 특수작물을 많이 하지만 예전에는 시골에서 목돈 만지려면 소 밖에 없었지." 매년 송아지(요즘 시세로 250~300만원)한마리씩 팔아 아이들의 학비, 하숙비를 보냈다. 이 할아버지도 2남3녀를 그렇게 키웠다.

이 할아버지는 매일 쇠죽을 끓여주고 싶지만 고추, 마늘 농사일에 바빠 가끔씩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취재팀의 요청에 따라 작두질, 쇠죽 끓이는 법을 보여줬다. "예전부터 어른들은 아이들이 만질까봐 작두를 조심스럽게 보관했지. 세째 딸은 혼자 여물을 썰다 손가락 하나를 잃었지."

그렇게 끓인 쇠죽을 어미 소에게 먹였다. 어미 소가 오랜만에 보는 쇠죽을 맛있게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10년후 쯤이면 다시는 보지 못할 장면일지 모르겠다.

글·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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