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위대했던 그 사랑, 할매가 그립다.

"할매, 너무 보고 싶어요."

할매가 그립다. 고향을 찾으면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겨주고 "내 강아지"하며 따뜻한 아랫목으로 끌어당기며 엉덩이를 토닥거려 주셨던 할매…. 하지만 이제 할매는 먼지 쌓인 사진첩 속의 빛바랜 흑백사진으로만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외할머니와 손자의 사랑을 다룬 영화 '집으로'를 만든 이정향 감독은 "할머니는 곧 자연"이라고 했고, 미국의 시인 월트 휘트먼은 "젊은 여자는 아름답다. 그러나 늙은 여자는 더욱 아름답다."고 노래했다. 문화계 인사들로부터 할매와의 아름다운 추억을 육성으로 들어봤다.

▲"할매, 약속 꼭 지킬게요."

할매가 계신 경남 함양은 문을 열면 덕유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아름다운 시골이었다. 방학이면 항상 할매집으로 갔다. 할매와 헤어질 때엔 가슴이 아파 부모님께 전학시켜 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할매는 항상 흰 고무신을 신으셨다. 할매 몰래 고무신을 가지고 친구들과 함께 개울가에 가서 송사리를 잡아 담기도 했다. 할매는 쌀과 콩 등을 시골 5일장에 내다 판 돈으로 붕어빵을 사주셨다. 시골이라 전기불도 들어오지 않았다. 호롱불 밑에서 한복을 지으면서 복주머니를 직접 만들어주셨다. 할매와 함께 바느질하던 기억은 작품의 테마를 정하는 데 큰 힘이 됐다. 할매는 내가 시집가기 전 예쁜 복주머니를 꼭 만들어 달라고 했다. 꼭 해드리겠다고 약속했지만 지키지 못했다. 결혼하기 1년 전 할매는 당뇨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늘 가슴 속에 간직했지만 지키지 못한 약속을 올해는 남편과 함께 산소를 찾아 꼭 지키고 싶다.(서옥순·42·서양화가)

▲향긋한 박하향!

할매하면 향긋한 박하사탕부터 생각난다. 할매는 경북 의성 안계에서 대구로 오실 때마다 항상 박하사탕을 가지고 오셔서 한 움큼씩 주셨다. 봉지에 든 것이 아닌 흰 면 손수건에 스무 개 정도 싼 것이었다. 대학 1학년 때 담배 피우다가 할매에게 들켜 혼이 났다. 나는 "할매, 저도 이제 대학생입니다. 이제 담배 피울 나이는 됐어예."라고 대들었다. 다음부터 할매의 선물은 박하사탕과 함께 한 가지가 더 늘었다. 바로 담배. 멋있는 할매였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신 여장부였다. 치마 속 복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은 지폐를 용돈으로 쓰라며 주셨다. 아버지는 무서웠지만 할매와는 모든 것이 잘 통했다. 일제강점기와 6·25를 지나면서 가장 힘든 시기에 남편을 여의고 고생하신 할매에 대한 기억은 연극을 만들면서 배역을 창조할 때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이상원·47·뮤지컬 '만화방 미숙이' 제작자)

▲영원한 안식처!

어릴 때 어머니는 가사와 농사일이 바빠 어린 자식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누구나 그렇듯 손자를 키우는 것은 할매의 몫이었다. 할매는 나를 키우실 때 한 번도 짜증을 내시거나 꾸지람을 하신 일이 없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반대하지도 않았다. 할매는 언제나 내 편에서 나를 보호해 주셨다. 할매는 영원한 안식처이자 구세주였다. 잔치 집에 나들이 가신 할매가 돌아오시기를 하루 종일 대문만 보고 기다렸다. 그 당시 돼지고기는 길흉사가 아니면 먹어볼 수가 없는 귀한 음식이었다. 할매는 그 고기를 드시지 않고 다른 음식과 함께 수건에 꼭 싸서 주셨다. 그 어떤 음식도 그때만큼 맛나게 먹어본 적이 없었다. 요즘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을 대할 때마다 할매 생각이 나서 눈물 흘릴 때가 있다. 효도 한번 제대로 해드리지 못하고, 사랑만 주고 가신 할매가 너무 보고 싶고 그립다.(송일호·68·소설가)

글·모현철기자 momo@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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