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040 광장] 기적을 믿으시나요?

이월은 언제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봄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기적처럼 냉이, 쑥과 민들레가 풀과 함께 들판을 초록으로 덮을 거며, 매화향을 맡으며 개나리도 피어나고 벌 나비도 날 거라는 걸 우리는 믿고, 기다린다. 봄이 와 눈 앞에 있을 때보다 더 봄을 상상하며 기다릴 때, 우리는 더 분명히 봄의 실체를 느낄 수 있다. 봄을 기다리는 그 설레임은 우주의 기운이 마음 속으로 들어와 일렁이는 것이요,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생기와 만나 어울어지는 것이다. 기다림과 설레임의 순간들은 고단한 삶에 희망과 생명력을 불어넣어준다. 지리한 장마 끝에 나타날 푸른 하늘처럼.

영화 '1번가의 기적'이 요즘 극장가에서 가장 많은 관객들이 든다고 한다.

이 영화는 여러모로 헐렁하다. 전반적으로 과장되고, 욕설과 폭력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웃찾사' 정도의 코미디 수준에서 그리 멀지 않고, 깊은 인간이해를 보이는 것도 아니다. 플롯, 사건의 개연성, 인물의 성격에 있어서도 치밀함이 부족하고, 웃음과 눈물의 완급 조절이라든가 특히 마지막 부분의 지나친 비약이 현실성을 떨어뜨리게 한다.

그런데도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것은 왜일까? '1번가의 기적'은 아~ 대한민국 도시 한복판에서 툭하면 수돗물도 끊기고, 인터넷도 안 되고, 구멍 난 양철지붕으로 여기저기 빗물이 새는, 재개발지역 달동네를 무대로 한다. 그 동네엔 암에 걸린 할아버지와 어린 남매가 살고, 권투선수였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양 챔피언을 꿈꾸는 소녀가장, 마을 아래 입구 슈퍼에 운동화를 맡겨두었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면 예쁜 구두와 갈아 신고 높은 계단을 오르는 젊은 여자, 하늘을 날고 싶어 날마다 지붕 위에서 뛰어내리는 소년이 산다. 그 곳에 나타난 개발업자의 하수인 건달이, 마을 사람들과 겪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 속의 장면들은 낯익다. 어쩌면 우리가 한번은 지나왔을, 혹은 지금 그 속에 있는 가난과 절망이라는 어두운 터널을 영화는 재현해 내기 때문이다. 길고 어두운 터널 안에서 악을 쓰고 피를 흘린다. 반면 영화 밖에 있는 사람들은 어두운 터널을 지나며 웃음을 터트리고 눈물을 찔끔거린다. 포클레인에 부서지는 담벼락과 함께 엄마와 할아버지가 깡패들에게 맞아 쓰러지고, 함께 챔피언을 꿈꾸는 명란이 맞아 쓰러지는 데도 영화는 암울과 절망의 코드로 읽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통의 시간들 안에 함께 살고 있는 무언가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사랑과 희망이다.

슈퍼맨처럼 나타난 건달이 그들을 모른 척 하지 못하고 방패막이가 될 때 관객들은 따뜻함을 느끼고 안도한다. 그가 하늘을 날고 싶어 하는 아이와 함께 날개를 만들고, 토마토 도둑으로 몰려 두드려 맞는 어린 남매의 보호자로 자처하고 나설 때, 동네 아이들이 할아버지 약으로 쓰기 위해 한 개도 먹지 않고 가지고 가던 토마토 한 상자로 몰매를 때리는데 어린 소년이 더 어린 여동생을 온 몸으로 막아주는 장면들에서 관객들은 사랑과 희망의 불씨를 발견한다. 그것이 가슴을 덥히며 웃고 울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설을 지내고 이혼율이 급증했고, 어여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명을 끊었다는 소식이 줄을 잇고 있다. 우울증 환자들이 늘어나고, OECD 가입국 중 우리나라가 자살률이 1위에 이르렀다 한다. 우리가 어떤 삶의 아득하고 우울한 터널 속에 있을지라도 사랑과 희망을 버리지 않을 때, 영화에서처럼 기적은 일어날 것이다.

예전에 소원을 종이 위에 적어본 적이 있다. 10가지를 쓰라고 했는데 7가지 소원을 썼다. 그 후 3년쯤 지났을 때 우연히 그 종이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에 적힌 7가지 소원은 이미 나에게 이루어져 있었다. 물론 나도 노력했다.

기적은 이렇게 모른 척 하지 않는 것, 꿈을 가지는 것, 그 꿈을 외면하지 않고 보살핌으로써 이루어진다. 내 안의 꿈을 보살피고 돕는 것과 동시에, 다른 사람의 꿈을 보살피고 지지해주시라. 심리학자 융이 말했던 것처럼 '동시성'의 원리에 의해 그 꿈은 안팎으로 성숙해가고 꿈을 이루기 위한 모든 조건을 만들어갈 것이다. 집 없는 사람에겐 집이 생기고, 누군가 간절히 그리운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만날 것이고, 새로운 여행을 소원하면 멋진 여행을 하게 되고… .

기적은 이렇게 온다. 봄이 오는 것처럼. 믿고 기다리고 내가 마음 설레며 맞을 때 기적은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눈 앞에 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은주(문화평론가·대구여성회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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