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고백하자면 최근 국내에서 출간되는 판타지 동화에 대해 몇 가지 선입견을 갖고 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지극히 어른의 시각이겠지만)를 그럴듯하게 포장해 놓은 책을 보면 혀부터 끌끌 차게 된다. TV에서 대조영이 뜨면 발해 관련 서적이 쏟아지고, 주몽 시청률이 올라가면 고구려 역사에 대한 책이 쏟아지는 판이니 새삼 장삿속이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논술 바람에 편승한 '논술을 위한 ~'류의 책은 닭살이 돋을 지경이다. 서점 신간코너를 돌아다니다 '출동! 시간구조대'(류가미 글/삼성출판사 펴냄)와 딱 마주쳤다.
오랜만에 나쁜 책의 조건들을 제대로 갖춘 책을 만났다는 묘한 희열감이 들었다. '논술을 위한 어린이 역사 판타지'를 부제로 단 이 책은 양장본 하드 커버에 눈이 뱅뱅 도는 요술 그림까지 그려놓고 유혹의 손짓을 하고 있지 않는가. '너, 잘 만났다'는 생각에, 반쯤은 설레고 반쯤은 결연한 심정으로 책을 뽑아 들고 첫 장을 펼쳤다.
줄거리는 시간의 소용돌이에 빠진 소녀 주인공이 박사, 인디언, 예언자와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위기에 처한 각 시대의 역사 현장을 찾아 다니며 시간 테러단과 맞서 싸운다는 내용. 그런데...한 장, 두 장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진다. '어라, 이거 재밌잖아!!!'.
1권 '황하 문명을 구하라'를 다 읽고, 2권 '그리스 민주주의를 보호하라'를 펴기까지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화선지에 그린 듯한 서양 동화풍의 삽화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스틸 컷(정지 장면)'처럼 매력적이었다.
소녀 유진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도서관에서 제목없는 책을 고른 순간, 4차원 공간에 툭 떨어진다. 어리둥절한 유진에게 나타난 고양이는 현재와 미래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시간테러단에 맞서 싸우라고 명령한다. 유진은 그때부터 해박한 지식을 가진 서양인 학자, 수정구슬로 미래를 내다보는 점술사 아줌마, 자존심 강한 인디언 소년과 함께 시간구조대의 일원이 돼 모험을 떠나게 된다. 판타지와 실제 역사를 잘 섞은 저자의 실력이 놀랍다.
유진이는 타임머신을 타고 기원전으로 가서 황하의 범람을 막은 중국의 우임금을 만나 위기에 빠질 뻔한 치수사업을 성공시키고, 중국 봉건제 성립에 큰 공헌을 하게 되는 어린 희발(주 무왕), 희단(주 공단) 형제를 구해낸다. 전국시대를 파괴하기 위해 납치된 공자, 노자, 묵자를 구출하면서 그들의 정치사상도 이해하게 된다.
2권에서는 에게문명의 발원지인 크레타 섬에서 미노타우루스와 맞서 싸우는 아테네의 테세우스 왕자를 돕고, 또다시 기원전 483년으로 날아가 훗날 아테네 민주주의를 완성하게 되는 소년 페리클레스를 시간테러단으로부터 구해낸다. 각 권 뒷장에 배치된 10여 쪽의 '부모님께 권하는 책 지도 요령'과 '연대표'는 판타지에 역사성을 부여한다. 세 살짜리 딸이 자라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권해주고 싶은 동화책이다.
최병고기자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탄핵안 줄기각'에 민주 "예상 못했다…인용 가능성 높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