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 청년이 꿈꾸는 세상

30대 초반의 일이다. 런던 출장은 성공적이었다. 선주를 처음 만나서 선박 2척의 신조 계약을 맺었다. 밀린 빨래를 가방 안에 넣고 계약서 두 권은 가방 맨 위에 얹고는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공항에서 짐 검사하느라 가방을 열어 보였을 때, 맨 먼저 계약서가 보였다.

세관 공무원이 물어보았다. "계약하고 오시나 봐요. 얼마예요?". 그래서 "약 오 천만 불 정도 됩니다"라고 말했다. "수고하셨다"며 "얼른 가보시라"고 배려를 해줬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던 80년 대 초반 이런 프리패스는 일종의 특혜였다.

세관공무원이 등 뒤에서 말했다. "우리는 운동선수 이기고 돌아오는 것하고, 세일즈맨들이 계약하고 오는 것 보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아요".

40대에 북유럽에서 그곳 판사 출신 변호사와 마주 앉았다. 일주일 넘게 계속된 계약서 작성 업무는 거의 필자를 탈진 상태로 몰아갔다. 저녁도 굶고 밤 열시까지 협상하는 것이 예사였다. 협상도 막바지에 접어들어 합의된 부분을 읽다가 문장 중에 전에 없던 쉼표가 들어간 것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쉼표가 들어가면 우리 회사의 이익이 통째로 발주회사로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당연히 "이렇게 합의하지는 않았다"라고 항의했다. 순간 그 변호사의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보았다. 잠시 휴회하고 다시 마주 앉은 변호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쉼표는 처음부터 있었다"고.

지구의 북쪽 끝에서 대한민국과 북유럽의 중년 사나이가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 첨예하게 대치하는 장면이었다. 극심한 긴장 가운데에서도 지금이 인생의 황금기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많은 여행을 하면서 여러 나라 친구를 사귀었다.

이집트에 가서 피라미드의 중심인 현실(玄室)도 보고 눈 내리는 노르웨이 피오르드 해안도 보았다. 그러나 그런 개인적인 즐거움이 일을 재미있게 해 준 것은 아니었다. 공장에 내려가면 근처 식당 주인이 와서 요새 계약 좀 있느냐고 물어 볼 때 조금 기다리면 많은 일감이 올 것이라고 대답하면서 느끼는 책임감, 현장에서 일하는 생산직 사원들이 출근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들이 모두 내가 열심히 해서 일을 많이 가져다주기를 바라고 있다고 생각할 때의 두려움, 이런 것들이 모두 모여서 일을 하게 만들었다. 해고의 두려움이나 박봉의 불편함 따위의 작은 걱정은 끼어들 틈도 없었다.

며칠 전의 일이다. 어떤 명문 대학의 후배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모두들 공무원 시험 준비 혹은 공사나 국책 은행에 입사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기업에 들어가서 세계를 무대로 자신의 꿈을 펼치겠다는 청년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선배 세대가 세계를 무대로, 마치 광개토대왕의 기병 부대같이 꿈을 펼치면서 달렸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 꿈은 없고 생존의 두려움만 있는 시대는 결코 제대로 된 시대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젊은이들의 모험심 부족이 그들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90년대 후반의 외환위기, 그 처리 과정의 미숙함, 성장과 동시에 분배를 중시하는 경제정책, 제조업의 해외 이전 현상, 신 성장 동력 발굴의 미완성, 사교육비 지출 경쟁으로 변해버린 평준화 교육 등 등 많은 요인들이 오늘의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서 꿈을 앗아갔을 것이다.

물론, 과거의 성공 방법이 오늘 그대로 반복될 수는 없다. 개발시대에 수출지상주의로 나라를 부흥시켰던 무용담은 그 시대에 가장 적합했던 성공 방법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오늘 이 시점, 오늘 이 국제적인 정치 경제 환경에서는 새로운 목표와 그에 걸맞은 새로운 방법이 창안되고 실현되어야 한다.

이런 과정을 밟아 나가는 속에서 우리 젊은이들의 모험심이 되살아나야 한다. 그래서 이십여 년 후 우리 후배들이 새로운 종류의 무용담을 그 후배에게 들려줄 수 있어야 한다.

선배들이 지금 이 시점에서 해야 하는 일은 이것이다. 젊은이들에게 그들 자신의 꿈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일, 그 꿈을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사회 전체적인 시스템을 새롭게 고쳐나가는 일이다. 누군가는 곧 할 것이다. 필자는 여전히 희망을 가지고 있다.

김연신(한국선박운용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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