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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 만행 기록이 3·1절에 던진 의미

제암리 虐殺(학살)사건의 은폐 과정이 처음으로 드러났다. 3·1운동 전후 2년 간 우리나라에 주둔했던 일본군 사령관의 일기를 통해서이다. 1919년 4월 15일 일본군이 경기도 화성시의 한 마을 사람 30여 명을 교회로 모이게 한 후 사살하고 불을 질러 태웠지만 "학살'방화를 自認(자인)하면 제국에 심대한 불이익"이 되므로 숨기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민들이) 저항해 살육한 것으로 했다"고 일기는 썼다. 3'1절 88주년을 앞두고 어제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에 보도된 그 내용은 한민족을 다시 한번 전율케 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한편으론 일본군 책임자의 은폐 기록이 뒤늦게나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나마 다행이 아닌가 생각된다. 乙巳(을사)보호조약 이후 본격화했던 한국 침탈 과정에서 벌였던 온갖 흉악한 범죄들에 늘 무책임 주장으로 일관해 온 게 일본이기 때문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征韓論(정한론)과 한국인 蔑視(멸시) 사상 정립 등을 통해 악화시켜 왔던 일본인의 시각이 지금껏 고착돼 있는 것도 그 탓일 터이다. 진작에 정리됐어야 할 양국의 과거사가 오히려 더 큰 갈등 거리로 되살아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점에서 양국 민간 연구자들이 공동 집필해 어제 두 나라에서 동시 출간한 '한일교류의 역사'라는 교재는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무려 10년이나 투자해야 했고 일본의 조선 倂呑(병탄) 등등 몇 가지 사안에 대해 시각을 일치시키는데 실패하긴 했지만, 노력만 한다면 양측이 역사 인식도 공유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일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각 사건들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침략자 쪽의 옛 기록 발굴일 터이다. 제암리 사건 관련 일기 발굴의 의미도 거기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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