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 노래의 정서는 그리움
대중가요 가사를 그 나라 국민의 정서와 시대상을 읽는 단서라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봄은 희망보다는 아쉬움과 그리움이었다. 시작되는 사랑이 아니라 지금은 가고 없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 끝나버린 사랑에 대한 미련인 것이다. 또 새로 뿌리내릴 장소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떠나온 고향에 대한 향수였다.
-찔레꽃-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언덕 우에 초가 삼간 그립습니다
자주 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이별가를 불러 주던 못 잊을 동무야.
달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세 동무
천리 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삼 년 전에 모여 앉아 백인 사진
하염없이 바라보니 즐거운 시절아.
연분홍 봄바람이 돌아드는 북간도
아름다운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꾀꼬리는 중천에서 슬피 울고
호랑나비 춤을 춘다 그리운 고향아.
▲ 백난아씨의 이 노래는 1941년 5월 태평레코드사 발매 음반으로 세상에 나왔다. 김영일씨가 가사를 쓰고 김교성씨가 곡을 지었다. 찔레꽃은 5월에 흰색으로 핀다. 연한 붉은 색도 있기는 하지만 드물다. 김영일씨는 이 붉은 찔레꽃을 생각했거나 다른 꽃을 염두에 둔 것인지도 모른다. 이 노래의 화자가 사는 공간은 3절에 드러나 있듯 북간도이다. 따라서 '남쪽나라'는 일제치하에서 떠나온 한반도를 말한다.
『노래가 발표된 일제 말, 대중의 반응은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해방된 후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향수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 짙은 향수와 공감을 준 것이다.
남북 분단 이후, 1절 끝의 '못 잊을 동무야'가 '못 잊을 친구야'로 바뀌었다. 이것은 동무라는 단어 때문인 듯하다. 2절에서도 '노래하던 세 동무'가 '노래하던 동창생'으로 바뀌었다. '삼 년 전에 모여 앉아 백인 사진' 도 '작년 봄에 모여 앉아 박은 사진' 으로 바뀌었다. 3절의 '돌아드는 북간도'는 '날아드는 내 고향'으로 변했고 끝의 '그리운 고향아'는 '즐거운 시절아'로 바뀌었다.
이 노래를 부른 백난아씨는 항구 뒷골목에서 젓가락 장단 두들기며, 한 많은 신세를 한탄하던 사람으로, 청승맞으면서도 정다운 목소리를 지녔다.』 -이동순, 번지 없는 주막 367p 요약.
이렇듯 1940년대, 50년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봄은 희망이라기보다 '그리움과 한'이었다. 한국가요에 있어 그리움은 이미자씨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동백꽃잎에 새겨진 사연
말못할 그 사연을 가슴에 안고
오늘도 기다리는 동백 아가씨
가신 님은 그 언제 그 어느 날에
외로운 동백꽃 찾아오려나
▲ 이미자씨의 '동백 아가씨'에 이르러 그리움은 기다림을 넘어 한이 됐다. 가신 님을 기다리며 얼마나 울었으면 꽃잎조차 빨갛게 멍이 들었겠는가. 노래는 동백꽃이 붉은 이유를 그리움에 지쳐 멍든 것이라고 말한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산업화 시기, 이별과 떠남이 생활이었으니 그리움이 오죽했을까. 봄을 견디기 힘든 그리움으로 표현한 것은 이미자에 한한 것이 아니다.
'이슬비 나리는 길을 걸으며, 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며 나 혼자 쓸쓸히 빗방울 소리에…(중략)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 언제까지 나리려나, 마음마저 울려주네. 봄비'
박인수의 '봄비' 역시 외로움과 눈물을 노래한다. 가수 박인수는 이 노래를 부르며 거의 울고 있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 '봄비 속에 떠난 사람, 봄비 맞으며 돌아왔네, 그때 그 날은, 그때 그 날은 웃으면서 헤어졌는데…. (중략) 서로가 울면서 창 밖을 보네….'
이은하의 '봄비' 역시 가버린 사랑과 돌아오지 않을 세월에 대해 노래한다. 그러나 봄비 내리던 날 웃으면서 헤어진 그가 돌아왔지만 내 안에 그는 없다. 그래서 두 사람은 재회했지만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창 밖을 보며 울뿐이다.' 그는 봄비가 되어 돌아왔지만 봄비와 함께 떠나야 한다.
▲ 세월이 가면서 그리움의 대상은 '고향' 혹은 '젊은 날'에서 '사람'으로 제한되는 경향을 보인다. 배따라기의 노래 '그댄 봄비를 좋아하나요'는 함께 봄비를 맞으며 걷던, 바람소리를 들으며 걷던 님을 그리워한다. 은희의 '꽃반지 끼고', 양희은의 '하얀 목련' 역시 봄날 함께 했던 연인을 향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 앞의 노래들이 어김없이 오고가는 세월과 오지 않는 님에 대한 막연한 기다림이라면 박미경의 '민들레 홀씨 되어'는 훨훨 '네 곁으로'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다. 물론 민들레 홀씨는 제 의지대로 날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역시 재회보다 그리움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에 반해 장미화의 '봄이 오면'은 기다림의 기대가 확신에 다다른다.
'그 추웠던 겨울은 지나고, 따뜻한 봄이 오면, 내 님도 나를 찾겠지.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는 따뜻한 봄이 오면 그 님도 나를 찾겠지. 핼로와 핼로와 꽃들은, 핼로와 핼로와 어디에….
▲ 꽃피는 동백섬에서 형제를 기다리던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그리움으로 시작해 재회로 막을 내린다. 지금까지의 노래가 막연한 그리움이었다면 '돌아와요 부산항에'서는 재회로 발전한 셈이다. 그런데 이 재회는 어딘가 어색하다. 불쑥 '돌아왔다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라고 매듭짓지만 만났다기보다, 보고싶은 욕망을 절절히 토로하는 것처럼 보인다. 너무나 그리워 한 나머지 환상을 본 것은 아닐까.
▲ 떠나고 없는 님이 아니라 곁에 님을 두고도 그리워하는 노래도 있었다. 해당화 피고 지는 섬 마을로 가보자.
해당화 피고 지는 섬 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 선생님
열아홉 살 섬 색시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선생님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
구름도 쫓겨가는 섬 마을에
무엇 하러 왔는가 총각선생님
그리움이 별처럼 쌓이는 바닷가에
시름을 달래 보는 총각 선생님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
이미자씨의 노래 '섬마을 선생님'은 섬 처녀의 사랑과 섬 선생님의 절망을 노래한다. 섬 처녀에게 총각선생님은 사랑이고 그리움이었겠지만, 서울(도시)서 온 총각선생님에게 섬은 유배지나 다름 없었다. 그가 그 섬에 머물고 싶었겠는가. 하물며 구름도 머물지 않는 외딴 섬에? 해당화 피고 질 때마다 총각선생님은 한숨으로 시름을 달랬고, 섬 마을 처녀는 불안한 눈으로 선생님을 지켜보며 빌고 또 빌었다.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
▲ 비교적 최근 곡인 캔의 '내생에 봄날은' 역시 지나간 봄날을 노래하지만 옛날의 봄 노래와 다르다.
'비겁하다 욕하지 마. 더러운 뒷골목을 헤매고 다녀도 내 상처를 끌어안은 그대가 곁에 있어 행복했다. 촛불처럼 짧은 사람. 내 한 몸 아낌없이 바치려 했건만 저 하늘이 외면한 그 순간, 내 생애 봄날은 간다.'
두 주먹 쥐고 겁 없이 살던 봄날은 가고 있지만 까짓 것 괜찮다. '가는 봄이 아쉽기는 하지만 행복했다.'는 식이다. 가사뿐만 아니라 곡도 청승과 애달픔에서 벗어나 이제 가는 봄을 보내고, 새로 올 계절을 맞겠다는 각오가 엿보인다.
조두진 기자 earful@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