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세기의 추억] ⑧폐역사

인적 없는 역사(驛舍)에 가본 적이 있는가. 그 쓸쓸함과 황량함에 가슴이 아프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오갔을 플랫폼에는 키 높은 잡초들로 무성하고 숱한 사연을 담고 있는 대합실에는 켜켜이 쌓인 먼지만 가득하다. 철로가 없어져 문 닫은 역에는 한점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철 지난 바닷가도 이보다 훨씬 나으리라.

오랜 세월 인간과 부대껴온 역들의 효용가치는 끝났다. 그럼에도 무관심 속에 방치돼 폐허로 변한 역이 있는가 하면 뒤늦게 '등록문화재'로 살아남은 역도 있다.

▼사라지는 역=문 닫은 역사를 찾으면 볼거리가 있다? 운행중인 역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을 꺼리낌없이 할 수 있기 때문일까. 이곳 저곳 맘대로 뒤져보고 철도원들이 남겨놓은 흔적까지 음미할 수 있다. 문경군 마성면 불정역이 대표적인 곳이 아닐까.

예전 문경선(문경~점촌)이 다녔는데 2005년 4월 폐선된 후 버려진 역이다. '철로 자전거'로 잘 알려진 진남역에서 국도 3호선을 따라 3km정도 내려오면 영강과 중부내륙고속도로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주민들은 "20년전만 해도 역사옆 공터에는 대성탄좌에서 운반된 석탄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고 했다. 석탄산업의 성쇠와 함께 운명을 같이 했기 때문인가. 이렇게 삭막할 수 있을까. 2년전만 해도 반듯하고 깔끔한 역이었을 것이다. 돌보는 사람이 없으니 대합실 문은 일찌감치 떨어져 나가고 역사가 지저분했다. 숙직실에는 오래된 신문이 쌓여있고 낡은 작업복이 못에 걸려있다.

건물구조는 일제 강점기때부터 볼 수 있는 소규모 역사의 전형이다.(1969년 개통) 역사 내부에 들어가면 오른쪽은 대합실, 가운데 기차표를 발매하는 승무실, 왼쪽 숙소가 있다. 역사 오른쪽에 가지런하게 서있는 것은 선로반 건물이다. 다른 역사와는 달리 외벽이 돌로 만들어져 독특한 정취가 묻어난다. 당초 지난해말 철거될 예정이었지만 주민들의 반대로 미뤄진 것만 해도 다행이다. 스산함을 짜릿하게 맛볼 수 있는 장소로 남겨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문경읍의 문경역, 예천군 보문면에 있는 보문역은 지난해말 없어졌다. 문경역사는 골프연습장으로, 그 옆의 화물터미널은 창고로 바뀌었다. 경북선(김천~점촌~영주)의 간이역이었던 보문역은 찾기도 어려웠다. 보문면사무소에서 내성천을 따라 2km 정도 올라가니 역 자리는 벌써 공터가 돼있었다. 불과 몇달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 자리에는 풀이 무성했다. 숭숭 구멍이 뚫린 벽돌로 만들어진 담장마저 없었더라면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라진 역사를 더듬어보는 것 만큼 허망한 일도 없다.

한국철도시설공단에 따르면 지난해말 철거된 역은 문경역, 보문역을 비롯해 호남선의 초강역, 신흥리역, 태백선의 함백역 등 5곳이다. 당초 철거 대상이었던 불정역과 영동선의 하고사리역, 정선선의 나전역은 주민 반대 등으로 무기한 연기됐다. 시설관리팀 손병기 차장은 "역사 보존에 대한 민원이 끊이지 않아 일단 철거를 중단하고 보존여부를 신중하게 판단하겠다."고 했다.

▼보존되는 역사=폐역은 입지에 따라 명운을 달리 한다. 같은 문경선이지만 진남역은 공원이 됐다. 문경시가 관광객 유치를 위해 철로자전거의 출발지로 임대했기 때문이다. 진남역은 불정역보다 규모가 작고 외양도 볼품 없지만 관광지인 탓에 살아남았다.

진남역에서 6km정도 떨어진 가은읍의 가은역은 보존되는 시설이다. 1955년 점촌~가은간 석탄수송을 위해 만들어졌다가 석탄산업의 쇠락으로 그 가치를 다했는데도, 지금은 철로자전거의 또다른 출발지로, 문화재청이 지정한 등록문화재(근현대 시설물 및 기념물)로 새 삶을 살고 있다.

역은 소담스럽고 간결한 형태다. 박공(면이 양쪽 방향으로 경사짐)지붕 형태에 세로로 긴 창문이 양쪽에 나 있다. 무엇보다 철로를 지긋이 밟아가며 산책하는 시민들이 많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역사앞을 가로질러 걸린 빨랫줄에는 옷가지가 널려있고 예전 기차를 기다리던 플랫폼에서 깨농사를 짓는 주민도 있었다. 주민들이 역사와 일체감을 갖기 때문일까.

대구에도 등록문화재로 보존되는 역사가 있다. 대구선 이설로 쓸모없게 된 동촌역(동구 검사동)과 반야월역(동구 신기동)은 1930년대에 건축된 간이역이다. 요즘에도 시멘트, 무연탄을 실은 기차가 하루 몇차례씩 다니지만 올해말 운행이 중단된다. 60, 70년대 동촌유원지를 찾는 시민들로 붐비던 동촌역은 큰 박공지붕(대합실)과 작은 박공지붕(승무실)이 멋진 균형을 이루는게 특징이다. 동촌역과 청전역 사이에 위치한 반야월역은 그 당시의 건축양식을 알 수 있을 만큼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동촌역 근무자 강신찬(59)씨는 "얼마후면 철도 운행이 중단되는 것이 아쉽지만 역사는 길이 남는다고 하니 다행스럽다."고 했다.

글: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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