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문밖을 나서니 갈 곳이 없구나

문밖을 나서니 갈 곳이 없구나/ 최기숙 지음/ 서해문집 펴냄

······

떠돌던 백성들 길 위에 너브러졌단 얘기 들었던가

형이 아우를 보살피지 못하고 아이는 어미를 잃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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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옛 책과 시를 잘못 읽어

내 근심도 해결 못하니 한 시대의 근심을 해결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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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에 나아가 배운 것을 펴고 싶지만

말 타고 문 나서니 갈 곳을 모르겠네

어찌하면 술항아리 얻어 마음껏 마시고

취하여 거꾸러져 모른 채 잠들 수 있을까.

조선후기 평민 문학가 정래교의 '눈보라(風雪歎)'란 작품이다. 평생을 익혀온 글이 평민이란 신분적 한계 탓으로 아무런 빛을 발하지 못하는 모습과 민중들의 처참한 삶이 낯설지 않다. 등골이 휘어가며 부모가 마련한 등록금으로 겨우 대학을 졸업했지만 사회로 나서자마자 지방대 출신이니 비명문대 출신이니하는 각종 사회적 차별과 든든한 연줄하나 갖지 못해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는 누구나 능력에 따라 사회경제적 지위를 얻을 수 있는 것이 현대 민주주의 사회라지만, 삶의 실제는 사회적 격차가 더욱 확대됨으로써 '부'와 '사회적 지위'가 세습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하물며 확고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의 양반 남성이 아니었던 마이너리티(=육체적 문화적 특질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고 불평등한 대우를 받아서 집단적 차별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연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조선시대 판 '마이너리티 리포트' 를 썼다. 그들은 집도 없고 가족도 없는 거지, 뛰어난 재능을 지녔어도 천민으로 취급받던 장인, 미치광이 소리를 들어야 했던 화가, 남몰래 숨어 산 궁녀,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기생, 살인을 하고도 석방된 부인, 요절한 천재 시인, 의로운 싸움꾼, 거리의 방탕아, 피 냄새 나는 백정,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을 함께 쓴 할아버지, 독학으로 명의가 된 사내, 유괴된 소년 등이다.

조선후기 문인들이 쓴 '전(傳)' 중에서 중인·평민·천민이 주인공 것들을 모아 우리말로 옮기고 '전'의 작가와 주인공의 관계에 대해 저자 자신의 상상력을 덧붙인 것이다.

요즘은 성공한 유명인의 전기가 살아있을 때도 여러 편 쓰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원래 '전'은 죽은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아 창작됐다. 따라서 '전'의 주인공은 작가가 잘 아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일 수 있다. 만일 누군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에 관해, 그것도 하층민으로 사회적으로 배척된 별 볼일 없는 사람에 대해 '전'을 쓰고 싶어졌다면 그 사람의 삶에 글 쓰는 사람 내면의 요구를 자극할 만한 무언가가 있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된 이야기를 지은 원작자 중 벼슬이 높고 권세가 있는 집안 사람들은 극소수뿐이고, 서얼이나 중인, 평민 출신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에서 지위와 명예를 넘어서 인간적 가치를 알아보는 밝은 눈으로, 또는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마이너리티의 삶은 기록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은 두 번 죽는다. 육체적 죽음 뒤에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는 것이 두 번째 죽음이다. 고인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도, 글을 써 달라고 부탁하는 이가 없어도 쓰는 사람의 의지만으로 지을 수 있는 '전'이라는 문학형식 덕분에 세상에서 버림받은 낮고 천한 사람들이 두 번째 죽음을 면하게 됐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낮고 천한 사람들이 강고한 신분제 사회의 틀 속에서 어떻게 자신을 지키며 살 만한 인생을 꾸려 냈는지 경험할 차례가 됐다. 비천하고 낮게 살아간 조선의 마이너리티가 인생이 무엇인가를 들려줄 것이다. 327쪽, 1만1천900원.

석민기자 sukm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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