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장, 하필이면 이 정월 대보름날 저녁에 숙직이 걸릴게 뭐람.'
파계로 오르막길에서 크렁크렁 숨을 껄떡이는 자동차 가속기를 지그시 밟으며 나는 또 한 번 없는 재수를 탓했습니다. 오르막 끝에서 우회전하여 들밀재를 오르는 굽이굽이. 삼년 째 출퇴근하는 길이라 핸들을 조작하기도 전에 차바퀴가 제 먼저 알아서 가는 길.
연수원 마당에 올라서자 이 장학사가 바통 터치하듯 차 시동을 걸며 당직 인계의 말씀을 날려댔습니다. "사방 문은 다 잠궜고, 하루 종일 근무자가 무료해서 혼이 났다는 사건 이외는 별 이상 없네. 박 주사는 동네 처녀들과 달마중 간다며 내려갔는데 조금 늦을 거고. 김 장학사 그럼 수고. 나, 가네." 도망치듯 내리막길을 미끄러져가는 소나타를 향해 손을 흔드는데, 이 장학사가 끼익, 차를 멈춰 차창으로 고개를 쑥 내밀고 "참 박 주사한테 부탁했었는데 개 밥을 안 주고 그냥 간 모양이야. 살펴보라고." 하더니 이내 계곡 아래로 사라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언제 왔는지 아리와 나리가 꼬리를 흔들며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지난 가을부터 연수원 식구가 된 녀석들. 개 보름 쇠듯 한다더니 정말 종일 굶었는지 녀석들의 배가 등에 올려 붙어 있었습니다. 녀석들을 데리고 사무실로 가 아내가 싸 준 찰밥을 덜어 줬더니, 웬걸 냄새만 맡을 뿐 입에 대질 않는 겁니다. 배가 고프면 먹겠지. 일부러 외면하고 한참 있다가 돌아보는데 찰밥 덩어리는 저만큼 두고 나만 쳐다보고 있는 녀석들과 또 눈이 마주쳤습니다. 이 외딴 세상 한 모퉁이에서 배고픈 짐승과 눈을 마주치는 일이란….
식당으로 가 이곳저곳 뒤적였지만 식은 밥 한 덩이도 없었습니다. 전기밥솥에 쌀을 씻어 안치고 냄비에다 김치조각과 먹다 남긴 통조림과 라면을 넣어 끓였습니다. 쫄랑쫄랑 따라온 녀석들은 조리실 바닥에 배를 깔고 눈빛으로 내 움직임을 따라다녔습니다. 얼마 후. 얼큰한 찌개에 뜸도 덜 든 새하얀 쌀밥을 말아 한 그릇씩 안겼더니 걸신들린 듯 허겁지겁 먹어댔습니다. 녀석들 옆에서 나도 한 그릇 말아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 지상의 저녁 한 끼를 함께 나누고 마당으로 나서는데 부인사 쪽 산등성이 위로 불쑥 보름달이 떠올라, 어느새 몰려와 있던 캄캄한 어둠을 지우기 시작했습니다. 서서히 퍼져가는 달빛. 달빛. 보름달이 그리는 새하얀 산천, 맑은 바람 소리. 우리는 국기게양대 아래 나란히 앉아 달을 맞았습니다. 달을 타고 두둥실 하늘로 떠올라 산천 위를 거닐었습니다. 밤이 이슥해서 마을 갔던 박 주사가 술에 젖은 유행가 가락 앞세우고 연수원 마당으로 오를 때까지.
10년이 지나도 보름달만 보면 떠오르는 삽화입니다.
김동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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