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수용의 현장리포트] '냅둬요' 증후군

아버지 : 요즘 어떠냐? 공부는 잘하고 있지? 성적이 조금 더 오르면 좋을텐데, 걱정이다.

아들 : (엉뚱한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예.

아버지 : 무슨 대답이 그래? 공부를 잘하겠다는 말이냐, 아니면 너도 걱정이라는 말이냐?

아들 : (여전히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며) 그냥 열심히 하는거죠.

아버지 : 그냥 열심히 하는게 어디있어? 할려면 제대로 해야지. 너는 꿈도 없냐?

아들 :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직 모르잖아요. 생각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어머니 : 아버지는 네가 걱정되서 하는 말인데, 열심히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하면 안되니?

아들 : (짜증스런 표정으로 어머니를 보며) 아까 열심히 한다고 말했잖아요? 나보고 어쩌라구?

아버지 : 왜 엄마한테 짜증을 내? 너 잘 되라고 하는 말인데 그렇게 듣기 싫어? 네 태도가 그게 뭐냐?

아들 : (한동안 말이 없다가) 열심히 한다고 전부 서울대 가는 건 아니잖아요?

어머니 : 서울대 가라는 게 아니라 뭔가 네가 제대로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걱정하지 않잖아.

아버지 : 사내 녀석이 해보지도 않고 매사에 흐리멍텅하게 그러니까 성적도 그 모양이지.

아들 : (더 이상 대화가 귀찮다는 듯) 네, 알았어요.

아버지 : 도대체 뭘 알았다는 거냐? 좀 진지하게 말해봐. 네가 대체 부족한 게 뭐가 있어?

아들 : 알았다니까요. 제가 알아서 할테니까 제발 잔소리 좀 그만 하세요.

아버지 : 이 녀석이 복에 겨우니까 아쉬운 줄 모르고 있구만. 나는 얼마나 힘들게 공부한 지 알아?

아들 : (자리에서 일어서며) 제발 좀 냅둬요. 아버지랑 저랑 같아요? 저도 힘들다구요.

부모들은 생각한다. 자녀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열심히 하라고 격려하는 건데 왜 아이가 짜증을 낼까? 시중에 '우리 아이 서울대 보내는 법'이라는 식의 책은 있어도 '우리 아이 100m 10초에 달리는 법'이라는 책은 없다. 서울대 가면 성공하지만 100m를 10초에 달려본 들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는 뜻이 아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타고난 신체조건이 따라주지 않으면 100m를 10초대 주파할 수는 없다. 정작 자녀가 잘 할 수 있는 길은 따로 있는데 '공부만이 살 길'이라며 부모 세대의 생존전략을 답습시키는 것은 아닐까? 바꿔 말해서, 아무리 달려도 10초는 도저히 깰 수 없는 벽인데 부모는 '좀 더 열심히 달리면 넌 할 수 있다'고 몰아부친다면 아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제발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두라고 외쳐댈 수 밖에 없다. 그게 '냅둬요 증후군'이다.

무기력, 의지박약, 흐리멍텅, 자포자기…. 과연 누가, 무엇이 우리 아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부모들은 '우리 아이는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고 싶지만 속내를 들여다보고도 이렇게 자신할 수 있을까?

◇ 적당히 살고픈 창우

올해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는 창우(가명.18)는 겉으로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지극히 평범한 학생이다. 회사원 아버지와 전업주부인 어머니, 풍요롭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부족할 것 없는 가정. 성적도 중위권이다. 중학교 시절에는 반 석차가 10등 안쪽이었지만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15등 정도로 조금 떨어졌다. 아침 7시면 잠에서 깨어 학교로 간다. 하교 후엔 막바로 학원으로 가서 밤 10시쯤 집으로 돌아온다. 늦은 저녁을 먹고 난 뒤 책상에 앉아 컴퓨터 게임을 잠시 즐기고 나면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여기까지가 부모님이 알고 있는 창우의 일상 생활이다. 성적이 조금 더 올랐으면 하는 바람이 가장 크지만 그렇다고 별다른 사고도 치지 않고 사춘기를 무사히 넘기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하다. 그다지 두드러질 것도 없고, 딱히 나무랄 것도 없는 말 그대로 평범하다.

하지만 창우는 다르다. 매사에 아무런 의욕이 없다. 아침에 학교에 가서 자습시간이면 만화책을 꺼낸다. 수업시간에 자리에 앉아있지만 선생님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엎드려 잘 만큼 강심장이 아니기 때문에 억지로 잠을 쫓으며 간신히 버틸 뿐이다. 좋아하는 과목은 그나마 낫지만 싫어하는 과목은 아예 설명을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학원에 가도 사정은 비슷하다. 학원이건 학교건 숙제를 하지 않으면 잔소리를 듣고, 특히 학교에서는 수행평가 점수에 반영되기 때문에 생색내기 정도로 과제물을 해낸다. 시험기간이면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한다. 하지만 싫어하는 과목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기 때문에 과목별 점수는 천차만별이다. 시험이 끝나면 점수만 매겨볼 뿐, 어떤 문제를 왜 틀렸는지 아예 생각하기도 귀찮다. 중학교 시절부터 늘 반복된 생활이다.

"공부를 왜 해야 하죠? 모두가 공부 잘해서 의대갈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적당히 대학가서 적당한데 취직해서 적당히 벌고 그렇게 사는거죠. 그렇다고 의대를 가거나 사법고시 합격할 실력은 안되잖아요. 학교도 잘 다니고, 학원도 안빠지고 가고 있잖아요. 그냥 하고 싶은대로 내버려두면 제일 좋겠는데, 어쩔 수 없으니까 그냥 이렇게 지내는 거예요."

장래 희망이 무엇인지를 두고 부모님과 대화를 나누던 창우는 "네가 좀 더 열심히 안하니까 성적이 그 모양 아니냐?"는 꾸지람을 듣고 이렇게 대꾸했다. 세상 사는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요즘 대학 나와도 취직이 얼마나 어려운 줄 아냐고, 너도 결혼하면 가장이 될텐데 그런 자세로 어떻게 살 거냐고 한바탕 잔소리를 했지만 창우는 눈만 꿈벅거릴 뿐 더 이상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여튼 이렇게 고생해가며 뒷바라지 하는데 제발 정신 좀 차려라."는 말로 대화를 마무리짓기는 했지만 부모 심정은 답답하기만 하다. "매를 들고 화를 내봐야 그 효과는 잠시 뿐입니다. 아무런 의욕이 없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요즘 아이들 왜 이렇죠?"

◇ 혼자서는 공부 못하는 미경이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가는 미경(가명.15)이는 갈수록 공부에 자신이 없어진다. 성적은 반석차 5등 안팎.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2, 3등 정도로 오를 수 있을 것 같은데 성적은 제자리걸음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원에 다니고, 지금은 영어와 수학 과외까지 하고 있다. 시험기간이면 학원에서 예상문제를 뽑아주고 과외 선생님들도 시험범위 복습까지 지도해준다. 시험칠 때마다 무엇을 외워야 하고, 어떤 문제에는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모두 가르쳐주기 때문에 별로 힘들 것도 없다. 하라는대로 하면 그 뿐이니까.

문제는 한번도 자기 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는 것. 때문에 학원에서 정리해주지 않는 과목은 공부할 때마다 막막하다. 전혀 엉뚱한 과목에서 점수를 다 까먹는 경우도 허다하다. 요즘 들어 엄마와 말다툼이 잦아진 것도 이런 이유다. "도대체 어떻게 된 애가 알아서 공부하는 법이 없니? 전과목 과외를 할 수도 없잖아. 중학생이 됐으면 이제 알아서 공부할 때도 됐는거 아니니?"

미경이는 답답하기만 하다. 딱히 어떤 이유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 성적이 마치 제 성적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물론 예상문제를 짚어줘도 스스로 공부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지만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런 식으로 했기 때문에 혼자서 공부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모의고사를 쳐야 하는데 예상문제를 짚어주는 식의 공부는 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더욱 자신감이 없어졌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독후감 과제물도 독서지도 선생님이 봐주었고, 미술 숙제는 미술학원에서, 다른 과제물은 엄마의 도움을 받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궁리하고 만들어낸 과제물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머리 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지만 엄마는 자꾸 재촉한다. 시험기간이 아니면 책상머리에 앉지도 않는 딸에게 조급증을 느끼기 때문. 결국 미경이는 엄마와 몇마디 대화도 못나눈 채 짜증을 내고 만다. "아, 좀 가만히 내버려둬. 그렇다고 공부 못하는 것도 아니잖아. 한번도 공부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데 나보고 어쩌라구? 제발 잔소리 좀 그만 해."

공부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는 말에 엄마는 기가 막히지만 화만 낼 것 같아 말을 접는다. 과외는커녕 학원도 다닐 수 없던 시절, 어렵게 공부했던 생각을 하면 복에 겨워 저런 소리를 한다는 생각 밖에 들지않는다. "한달에 과외비, 학원비로 나가는 돈이 얼만데, 저하나 믿고 제대로 뒷바라지 해주려고 하는데 짜증만 냅니다. 혼자 공부하게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인데."

◇ 10년차 중학교 교사의 푸념

"학부모들이 자녀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이 '알아서 할테니 제발 좀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알아서 하지도 못하면서 그저 매사가 귀찮고 의욕이 없는거죠. 자기가 하고픈 일을 못하는 답답증이 그렇게 표현되는게 아닐까요? 학교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스스로 제 일을 찾아서 하는 학생은 5%도 안됩니다. 유치원생 가르치듯이 하나하나 다 알려줘야 합니다."

"수업이 끝나고 교실문을 잠그라고 문만 잠급니다. 교실안에 불이 켜져 있으면 불을 꺼고 문을 잠그는 것이 순서 아닌가요. 일일이 지시를 해줘야해요.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이 없습니다."

교사 생활 10년째로 접어드는 정모(34.여) 교사는 요즘 학생들이 심각한 상태라고 진단했다. 35명 학생 중 제대로 수업을 따라오는 학생은 5명 남짓. 수업내용을 이해하는지 물어봐도 대답이 없다. 한명씩 지목해서 물어보면 그제서야 마지못해 답을 할까,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이 부분, 알겠어요?"라고 물어보면 마치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이다. 한마디로 수업에 맥이 빠진다는 것. 수업시간에 손을 들고 질문하는 풍경은 영화에서나 나온다. 행여 그런 아이가 있으면 오히려 외계인 취급을 받게 된다.

"딱히 꼬집어서 이게 문제라고 말할 수 있으면 차라리 나은데 그것도 아닙니다. 성적이 좋고 나쁘고 문제도 아닙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왜 나오는지, 왜 이 자리에 앉아있는지조차 모르고 그저 있으라니까 있다는 표현이 맞겠죠. 필기를 하라고 해야 그제서 필기하고, 이 부분은 중요하니까 표시하라고 해야 볼펜으로 줄을 칩니다. 교사들마다 심각한 상태라고 입을 모읍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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